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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일상은 아름다워

270번 버스에서 만난 그녀의 웃음

"여러분,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여러분,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청량리로 향하는 270번 버스 안. 커다랗고 네모난 통을 안고 탄, 앳된 얼굴 여학생이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순간 모였다가 흩어진다. 버스 밖 번쩍이는 네온사인들을 보며 엄마와 통화 중이었던 나는 속으로 잠깐 쟤가 왜 저러나 싶었다. 새로운 모금 방식인가, 요새는 저렇게도 하네, 하고.

 

실은 심기가 내내 불편했다. 다소 침체됐던 생활에 변화를 주려 열흘 전쯤 머리를 새로 했건만, 미용실 아주머니 실수로 머리카락 끝이 다 상해서다. 오늘 찾아 갔더니 보자마자 별말 않고 머리를 다시 해준다. 싫은 소리 몇 마디 할까하다가 관뒀다. 미용실 거울 속 보이는 내 얼굴은 왠지 낯설다. 입술 밑 한 일자(一) 흉터 있는 여자가, 무뚝뚝하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근 한 달 간 좀 지쳐있었다. 지난 해 말 자취집에 도둑이 들었다. 나름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도둑은 또 처음. 간 큰 이 녀석은 철장 세 개를 끊고 이중창을 깨뜨려 기어코 방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그렇게 공들여 들어온 곳이 책과 신문 외엔 별 거 없는 사회초년생 원룸이었다는 건 아마 들어와서야 알았을 게다. 노트북과 디카 등 팔아서 돈 나올만한 물건들은, 웃기고 슬프게도 밖에 있던 내 가방 속에 모두 들어있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상황이 겹쳐 심신이 참 피곤한 나날이었다.

 

"저는 OOO에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여러분 저녁 시간이라 많이 힘드시죠, 그래도 오늘 하루 힘내서…" 통화 중에 얼핏 들은 학생의 설명은 이랬다. 잠깐 쳐다보던 사람들은 이내 딴 곳으로 휙 눈길을 돌리는데, 그녀는 말하는 내내 환하게 웃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모금통을 들이밀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버스에 올라탄 지 세 정거장이 다 되갈 무렵, 버스기사에게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내릴 채비를 하기에 걸어가서 물었다. 저기, 몇 살이에요?

 

"아, 저 스물 한 살요." 커다란 모금 통을 안은 학생은 봉사단체 소속이라고 했다. 민통선(민간인통제선), DMZ 근처 지역 노인들을 위해 봉사를 한 게 활동의 시작이었다나. 자기가 왜 이 일을 하는지를 설명하며 그녀는 또 다시 해맑게 웃었다. 자기가 어디 서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의 미소였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에선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묘한 감정이 일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표정으로 누군가를 쳐다본 적이 분명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통 속에 넣었다. 스물한 살 그녀는 "와,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또 한 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듯 웃어 보인다. 미용실에서 쓴 9만원은 후회막심이었는데 이 돈은 전혀 아깝지 않다. 사실 이건 자선이 아니라 감사였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지쳐있던 나를 일깨운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 부모님이 기다리는 집, 정말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 웃음에 대해 생각했다. 회색빛깔 일상에 반짝, 작지만 환한 불빛이 켜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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