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 함께/취한 글들의 시간

어린 여우를, 이따금 나타나는 사슴을, 그해 처음 만나는 제비를, 풀밭이 초록빛에서 황금빛으로 바뀌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다. 밤에 가만히 앉아 눈에 보이는 사천오백 개의 별을 하나씩 세어보고 싶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이 모든 것을 하고 싶다. 그래서 침묵이 내게 다가올, 내 안에 깃들 기회를 얻고 싶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정말 모른다.

 

가끔은 침묵이 블랙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블랙홀에서는 중력이 워낙 강력히 작용하여 무엇도, 심지어 빛조차 그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블랙홀은 그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돌이킬 수 없이 끌어당기고 빨아들여서 그 자체의 덩어리로 응축될 때까지 압축하고 쥐어짜고 다진다. 시간도 느려진다.

 

한번 시작되면 느린 화면을 보는 듯 어떤 물체도, 심지어 인간의 자아도 늘어뜨려지고 뒤틀리고 일그러지며 그 중심으로, 특이점으로 끌어당겨지듯 압축되어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지 물리학자도 잘 알지 못한다어쩌면 물리와 정신의 법칙을 뛰어넘어 대안적인 우주로, 새로운 우주로, 신에게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나는 위험을 기꺼이 맞닥뜨릴 준비가 되어있다. 공포와 위험이 아름다움과 손을 잡고 걸어간다. 공포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다른 것은 없다


바라건대 나머지는 침묵이기를.

 

- 침묵의 책, 세라 메이틀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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