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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고 # 를 읽고 나서. 최근에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무심코 TV를 지켜보던 중 유독 특정 광고가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보도전문채널 이 자사를 홍보하는 내용의 TV광고였는데, 광고 속 여성이 매우 수동적으로 그려졌다. 남자가 정장을 입고 출근하며 뉴스를 챙길 동안 여자는 주방에서 그릇을 닦으며 뉴스를 본다. YTN이야 '남녀노소 모두 우리 뉴스를 본다'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만, 나는 거기 담긴 구시대적인 발상에 매우 화가 났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스스로에게도 놀랐다. 무던하게만 살아온 내게 이런 면이? 젠더 감수성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키워지는 거구나. 그때 알았다. 어제(21일) 논란이 됐던 잡지 '맥심' 표지사진 논란도 맥락은 비슷하다. 맥심은 9월호 표지모델로 영..
270번 버스에서 만난 그녀의 웃음 "여러분,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여러분,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청량리로 향하는 270번 버스 안. 커다랗고 네모난 통을 안고 탄, 앳된 얼굴 여학생이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순간 모였다가 흩어진다. 버스 밖 번쩍이는 네온사인들을 보며 엄마와 통화 중이었던 나는 속으로 잠깐 쟤가 왜 저러나 싶었다. 새로운 모금 방식인가, 요새는 저렇게도 하네, 하고. 실은 심기가 내내 불편했다. 다소 침체됐던 생활에 변화를 주려 열흘 전쯤 머리를 새로 했건만, 미용실 아주머니 실수로 머리카락 끝이 다 상해서다. 오늘 찾아 갔더니 보자마자 별말 않고 머리를 다시 해준다. 싫은 소리 몇 마디 할까하다가 관뒀다. 미용실 거울 속 보이는 내 얼굴은 왠지 낯설다. 입술 밑 한 일자(一) 흉터 있는 여자가,..
2014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추운 겨울이 싫다. 겨울이 지나야 봄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싫다. 손발이 차서 추위를 잘 못 견디는 내 탓도 있지만 그보다도 가뜩이나 추운 사람들 더 춥게 만드는 게 싫다. 어제 오랜만에 세월호 광화문 농성장에 갔는데, 밖으로 거세게 이는 바람에 천막이 무너질까 겁날 정도였다. 사고 이후 누구보다 친해진, 각기 아들을 잃은 민우아빠와 영석아빠는 큰 겨울코트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농성장을 비울 수 없으니 거기서 잔다고 했다. 정부가 지난 11일 실종자 수색작업을 종료하겠다고 발표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정부에 수색중단을 요청했다고 한다. 우리 아빠, 내 딸, 내 동생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돌아서면서도 "누군가에게 고통이라면 저희가 수중수색을 내려놓겠다"고 한다. "저희 결정으로 인해 정부의 고뇌도..
'눈물이라는 뼈' 바이라인이 부끄러운 글들을 써제끼고 있다. '써서', '제끼고' 있다. 내 펜날은 왜 이리 뭉툭한가. 왜 내 논리는 이리도 허술한가. 시간 부족, 경험 부족, 취재 부족... 핑계 댈 거리는 많지만 그것들이 모여 '자질 부족'으로 귀결된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기사를 끙끙 뱉어내고도 결국 남는 것은, 마감마저 어긴 허접스레기 기사와 자괴감. 울고싶다가 급기야 울먹울먹하다가 겨우 눈물을 삼키는 날들. 짠맛이 나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다가, 재작년인가 비슷한 상황에 있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사고 후 수술한 발목이 마음대로 굽혀지지 않아서 어금니를 깨물고 재활하던 어느 봄날. 그 와중에 또 학교를 다니겠노라 고집을 부려서, 친구들에게 힘든 맘 아픈 발목 들킬 ..
허우적거리는 삶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의식이 생활에 더 밀착해 있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사물을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똑바로 걷고 있지만, 당신의 그림자는 허우적거려요. 당신의 그림자가 똑바로 걷고 있을 때에는 당신만이 허우적거려요. 당신은 태어나서 허우적거리지 않은 적이 없어요. 당신이 부정할지라도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우리 모두는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손가락질하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반듯하게 걸으며 살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에요. 우리의 허우적거림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 테죠. 허우적거리는 것만으로 우리는,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표현을 하고 있고요. 허우적거림은 나의 자세를 ..
정치부 첫날, 인생의 야마. 수습기자로 국회 출입 첫날, 정론관에서. 꽤 오랜 시간 블로그를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얘기도, 정리하고픈 일상도 많았는데 마음만 바빴던 시간들. 언제가 돼서야, 무슨 일이 있어야 글을 쓰게 될까 스스로도 궁금했는데... 늘 그렇듯 계기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었다. 정치부 와서야 이렇게 글을 남긴다. 지난 주 넘겨 들은, 정치부 선배의 한 마디. "기사 야마를 이렇게 못 잡아서야... 인생의 야마는 잡을 수 있으려나."다른 수습에게 한 말이었지만 동시에 나 들으라고 한 말이기도 했다. 따끔했다. 정치부 첫 날 수습평은 이렇다. -무식한 기자는 사회악이라더니 정말 그렇다 : 나는 무식한 기자다 : 고로 나는 사회악이다....(먼산)-쪽팔리고 부끄러운데 쪽팔려 할 시간도 없었다. 미친듯이 타이핑하고 ..
'문턱에서 운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침부터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유... 사실 아는데 모르는 척 하고 싶었다. 두려워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그 말이 내 귀에 들리고, 또 다시 마음을 만들고 나를 얽매어버릴 것만 같아서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나는 세상이 무섭지 않았다. 대다수 사람들은 선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인지 낯선 사람을 만나거나 말을 거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노력해서 얻었다. 환경이 좋아서 모든게 거저 '주어지는' 삶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원하는 것, 원하는 꿈에는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갔고 결국에는 가지거나 이뤘다. 스물다섯까지의 내 삶은 그런 선택들의 총합이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야하는 어려운 삶은 아니었지만, 돌멩이 하나 발에 채이지 않..
최초의 경이, 박완서 이미 가을이 깊었습니다. 엊그저께는 친구하고 전화하다가 단풍 얘기가 나왔습니다. 지리산 청학동의 어느 골짜긴가에 기막히게 아름다운 단풍길이 있었답니다. 그 길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 저러하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우리 집 부엌 창문 밖으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보였습니다. 그날 갑자기 물든 게 아니련만 내눈에 띈 건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며칠 있으면 으스스 몸을 떨며 그 고운 잎을 아낌없이 떨구겠지요. 은행나무가 헐벗고 나면 그 밑의 보도가 얼마나 아름답고 푹신한 황금빛 융단을 깔게 되는지 우리는 압니다. 가을은 이렇게 우리가 마중을 가도 오고, 안 가도 옵니다. 기다려도 오고 안 기다려도 옵니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