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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배우며/황홀한, 글감옥

<이토록 극적인 순간들>


- 어머, 아가씨는 젊은 나이에 왜 이렇게 많이 다쳤어? 교통사고야?


- 아... 그게 그러니까요, 낙상이요. 건물 4층에서 떨어졌어요.


- 건물? 아니 왜?


- 어... 그게. 저는 기억이 잘 안나는데 위경련이었던거 같대요. 그것도 똑바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떨어지다가 한번 다른데 부딪혀서 살았대요. 그래두 처음보다는 되게 많이 괜찮아진거에요.


- 아이구 어떡해...나이도 젊은데.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겠어.


- 네.. 처음엔 진짜 심각했는데. 지금은 옛날보다 많이 좋아져서요. 이제는 걱정 안하세요.

 


만약 당신이, 평소와 다름없이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두 다리가 부러져 있어 걸을 수 없게 된다면 어떨까요. 거기다 턱까지 부서지고 이빨이 나가 밥을 씹을 수조차 없다면? 정말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고 일어나기 힘든 일이지만, 그 영화 같은 일이 제게는 어느 날 갑자기 마주한 차가운 현실이었습니다.



저는 스물다섯의 젊고 건강한, 그리고 기자가 되길 꿈꾸는 평범한 여대생이었습니다. 2010년 초 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언론사 시험을 준비했지요. 그냥 기업에 입사해 돈을 벌까도 생각했지만, 저의 재능으로 나 혼자 행복해지기 보다는 기자가 되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처음엔 멀고 힘들었던 기자의 길이었지만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점점 실력이 쌓였고, 그런 만큼 언론사 입사도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지상파 방송사 최종 면접에서 안타깝게 떨어지는 등 꿈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그 순간, 그러나 그 때 제 삶은 난데없이 극적인 순간을 만났습니다.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토론을 하고 저녁을 먹고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수없이 반복된 하루 중에 지나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 날 밤 11시경 저는 4층의 고시원 베란다에서 아래로 떨어졌고, 사고 당일로부터 정확히 20일이 지난 후에야 겨우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낙상 사고로 인해 당시 스물 다섯, 한창 젊고 예뻤던 여대생은 두 다리와 한쪽 팔이 부러지고 턱뼈가 으스러지는 큰 중상을 입게 되었던 겁니다.



이토록 큰 사고를 당했지만 그러나, 신기하게도 저는 당시 사고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이는 ‘심인성 해리장애’라는 말로 설명되는데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사고와 그에 따른 큰 외상의 충격을 몸이 감당하기 어려워, 무의식이 의도적으로 힘든 기억을 지워버리는 경우지요. 그러나 고시원 CCTV에 따르면 사고 당일 밤 10시경 방에 들어온 저는 곧 갑자기 복도로 뛰쳐나와 비틀거리더니 몸을 떨며 발작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도 별다른 질병 없이 건강하게 지낸 저였기에 발작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원인이 위경련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사고를 목격한 사람도 없고 사고를 당한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니 정말 추측만 할 뿐이지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생사를 넘나들며 18일 동안 중환자실에서서 있다가 일반 병실로 옮긴 후,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했던 저는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 의도적으로 저를 해치기 위해 꾸며놓은 연극이라고만 생각했었지요. 가족들이나 친구들같이 아는 사람이 아니면 무조건 의심했고 붕대로 칭칭 싸매놓은 다리 부상도 거짓말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상처 소독을 위해 붕대를 풀고 찢어지고 꿰맨 상처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가족들의 설명과 지금 있는 곳이 대학병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제가 크게 다쳤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황당할 뿐이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두 다리가 부러져 걸을 수 없다니요. 어제만 해도 걷고 뛰어다녔던 기억이 생생한데, 사실 지금이라도 일어나면 당장 뛰어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없다니 분하고 억울하고 답답했습니다. 게다가 두 다리 모두 쇠로 고정을 한 탓에 예전엔 혼자 할 수 있었던 일도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다 자란 여자성인이 대소변을 알아서 해결할 수 없다니, 밥도 혼자 먹을 수 없어 누군가 떠먹여줘야만 한다니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탓할 곳도 탓할 사람도 없었고, 내 앞에 남은 것은 으스러진 다리뼈가 다시 자라고 붙을 때까지, 감당하기 벅찬 현실뿐이었습니다.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과 이제는 할 수 없게 된 일들. 이것조차 내 삶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왜 하필 나였을까요? 왜 하필 그 날, 그리 늦지도 않았던 그 시간, 비틀거리던 저를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걸까요. 4층에서 떨어지던 당시 중간에 위치한 간판에 부딪힌 덕에 저는 간신히 죽음을 피해갈 수 있었지만, 그래도 머릿속에서는 불만 가득한 ‘왜?’라는 질문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살게 될까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은 대체 무엇이고, 나를 이렇게 다치게 한 신의 뜻은 무엇인지. 겉으로는 항상 밝은 척 괜찮은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저런 생각들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갈데없는 분노로 모난 마음 탓에,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란 사람들의 위로도 오히려 상처로 받아들이고는 했었지요. 병실에서의 긴 하루 끝에 잠들면서도 늘 이 현실이,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꿈에 불과하길 간절히 바라곤 했습니다.  
         

그러나 삶이란 어찌나 오묘한 것인지. 우리가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던 막다른 곳이 때로는 출구가 되고, 모두가 축복이라 믿었던 일이 가끔은 재앙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고에 없던 사고로 꿈도 잃고 건강도 잃고, 현재는 물론이고 환히 빛나던 미래도 깜깜하다며 슬퍼하던 저는, 그러나 어쩌면 가장 캄캄한 지금이 동트기 직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바꾼 계기는 바로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지낸 18일 동안 저는 온 몸의 피가 빠져서 죽는다던가 저기 외딴섬의 병실에 갇혀 평생을 늙어간다던가 하는 말도 안되는 악몽들을 줄지어 꾸었지요. 침대 위에 누워 온 몸이 묶인 채 눈만 껌뻑거리면서도, 그 악몽들이 현실인줄 착각해 면회 온 가족들에게 살려달라 헛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일반병실에 올라와서도 저는 ‘잠들면 죽을 거야, 죽을까봐 너무 무서워’라는 등의 헛소리를 하며 이를 악물고 밤을 새곤 했습니다. 마음 약한, 어려서부터 유독 딸을 아끼던, 착하고 여린 우리 아빠는 결국 저렇게 말하는 제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지요. 
 

“성애야 아빠 못 믿어? 믿으라는데 왜 자꾸 이래. 아빠 허락 없인 아무도 널 못 건드려. 아빠가 그 정도도 못할 것 같아? 니가 죽게 아빠가 내버려두겠어? 아빠 한번만 믿고 자자. 푹 자야지 피가 돌고 그래야 몸이 빨리 낫지.”



늘 자상하고 조용하던 아버지의 간절하고도 애타는 다그침 앞에서. 그제야 저는 다친 저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버지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게,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한 딸을 보며 그저 참담했을 아빠와 엄마, 그리고 혹시라도 잘못 되는 건 아닐까 마음 졸였을 친구들과 함께 기도해주셨던 교회 분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결을 따라 가다보니 눈물겹고 죄송스럽기만 했습니다. 참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고, 힘들게 만들면서도 나는 잘도 모르고 있었구나, 잘도 잠만 자고 있었구나, 하구요. 



돌아보니 곁에는 언제나 제가 울 때 함께 울어주며 손잡아주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몇 년간 만나지 못했던 중학교 친구까지 소식을 듣고 달려와 위로해주었으니까요. 단지 다쳤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넘치도록 사랑받아도 되는 것인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심어린 응원과 기도 덕분에 절망하던 저는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당시 나는 죽을 수도 있었지만 5%의 확률로 살아남았다고, 그러니 상처야 어찌되었든 이렇게 살아있기만 하면, 포기하지 않기만 하면 희망은 항상 존재하는 거라고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꼭 다시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요.



가장 힘들었던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으로 기대어 쉴 수 있었던 덕에 이제 저는 부러진 앞니를 가지고도 크게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치료는 현재진행형이라 심하게 다친 다리는 수술을 몇 번 더 받아야하고 또 오랜 시간 고통을 참아내야 하겠지요.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불 꺼진 병실안 모두가 잘 때 혼자 울어야 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끝내 희망을 놓지는 않을 겁니다.



지난 몇 개월간 일어났던 사건과 경험했던 일들이 앞으로 내 삶에 어떤 형태로 자리잡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왜 하필 나였는지, 왜 굳이 그때 거기서 떨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틈새가 어디인지, 신의 뜻이 무엇인지 저는 계속 궁금해하지만 결코 그 답을 결코 알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시간은 충실히 흐르고, 봄은 다시 찾아오고, 사랑하는 이들은 변치 않고 제 곁에 있을 테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건강하던 스물다섯 아가씨가 어느 날 위경련을 일으켜 4층에서 떨어지고, 생사를 넘나들다가 겨우 깨어나지만 사고의 기억은 전혀 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드라마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지만- ‘왜 하필 나였냐’고 부르짖는 원망에서 ‘하필 나여서 다행’이라고 감사하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도, 그런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는 것도 인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도 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새롭게 주어진 하루에 감사합니다. 다리가 으스러지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머리와 허리를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점점 좋아지는 상처부위를 보며 빠르게 회복하는 제 몸에게 감사합니다. 오늘 주어진 하루가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 지금 만나는 사람과의 만남이 마지막이라 그렇게 생각하며 한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행복합니다. 그렇게 밝은 면들을 보려 노력하면서 제 삶의 ‘이토록 극적인 순간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거짓말 같았던 시간들이 지나고도 저는 여전히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추운 겨울이라 조금 웅크리고 있지만, 이제 곧 따뜻한 봄이 오면 더 활짝 피어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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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샘터상 생활수기 부문 응모작. 어떻게 써야할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느라 결국 마감 당일에야 수기를 완성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정리가 안돼 끝까지 끙끙댔지만. 지금보다 too many 쉼표가 등장했으며 이날 퇴고를 해준 승호는 비록 'GREAT!'가 아닌 'It's okay'의 느낌으로 말했었지만... 뒤섞여있던 여러 경험들을 나름대로 정리해 한 편의 글을 뽑아낼 수 있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