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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배우며/황홀한, 글감옥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고

#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고 나서.


최근에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무심코 TV를 지켜보던 중 유독 특정 광고가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보도전문채널 <YTN>이 자사를 홍보하는 내용의 TV광고였는데, 광고 속 여성이 매우 수동적으로 그려졌다. 남자가 정장을 입고 출근하며 뉴스를 챙길 동안 여자는 주방에서 그릇을 닦으며 뉴스를 본다. YTN이야 '남녀노소 모두 우리 뉴스를 본다'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만, 나는 거기 담긴 구시대적인 발상에 매우 화가 났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스스로에게도 놀랐다. 무던하게만 살아온 내게 이런 면이? 젠더 감수성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키워지는 거구나. 그때 알았다.


어제(21일) 논란이 됐던 잡지 '맥심' 표지사진 논란도 맥락은 비슷하다. 맥심은 9월호 표지모델로 영화에서 주로 악역을 맡았던 배우 김병옥을 실었다. 표지 속 담배를 피는 김병옥 뒤로는 검은 차의 트렁크 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사이로 발목에 청테이프가 둘둘 말려있는 하얗고 매끈한 다리가 허벅지까지 보인다. 옆에 "여자들이 나쁜 남자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진짜 나쁜 남자는 바로 이런 거다. 좋아 죽겠지?"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단 표지는 즉각 구설수에 올랐다. 맥심은 이후 "영화적 연출일 뿐 성범죄를 미화한 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그럴 경우 꼭 '여성 다리'일 필요는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은 떨어진다. 무엇보다 여성의 납치·살해는, 화보가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상대의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했어도 피할 수 있었을 논란이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그간 왜 이렇게 여성 폭력에 무감각했을까? 이 문제가 왜 나의 문제라는 자각이 없었을까? 성추행을 당했다거나, 혹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하는 친구(혹은 지인)들이 주변에 별로 없었던 탓일까? 그러다 곧 깨달았다. 지나치게 일상적이어서 오히려 무감각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밤늦은 퇴근길 집으로 가는 골목에 남성이 서성일 때 두렵고, 예전에 집에 들었던 도둑(남자다)이 다시 한 번 창문을 깨고 들어올까 무섭다. 특이한 개인적 경험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 대다수 여성은 비슷한 걱정을 하며 산다. 그러나 이게 당연하거나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구조적인 문제는 없는지도 생각해봤다. 사실 우리 주위에 장애인들이 잘 보이지 않는 건, 길거리에서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보는 게 새삼스러운 건 사회 구조적인 시설과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추행과 성희롱,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 자체가 적은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아직 그들이 겪는 문제를 품고 해결해줄 만큼의 기본이 되지 않은 건 아닐까. 저자는 "최근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강간 피해자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젊은 여성 피해자들은 입을 열었다는 이유로 괴롭힘과 협박을 당하며 일부는 자살까지 시도한다(160쪽)"고 했다. 이건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 않나. 성추행‧성폭행을 이유로 공공에 발언하고 나서는 여성은 어떤 식으로든 2차 피해를 겪게 되기 마련이다.


해법이 있을까. 저자 레베카 솔닛은 관련해 "페미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호명하고 정의하려는 싸움, 발언하고 경청 되려는 '이야기의 싸움'"이라며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내러티브를 통해 싸움의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179쪽)"고 말한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논란이 비슷하고 매번 똑같은 양상을 띤다 하더라도, 혹은 누군가로부터 '꼴페미', '진지충'이라고 몰린다 하더라도, 자꾸만 지적하고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나는 성적 피해자들의 회복도 이야기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고 본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한국성폭력상담소 주최로 매년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가 열린다.


물론 어렵고 복잡한 일일 수 있다. 한국에서 보통 이야기되는 '페미니즘'은 왜곡된 측면이 있는 듯하다.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그렇다. 아직까지 내게는, 매사 남/녀란 이분법적 시각으로 나누는 불필요한 성대결과, 성차별을 깨기 위해 꼭 필요하고 정당한 싸움이 어떻게 다른 건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어느 때는 나서서 싸워야 하고 어느 때는 그렇지 않을지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얘기다. 


감수성을 가지고 산다는 것도 한편으론 피곤한 일이다. 젠더 간 차이를 알고, 거기서 파생되는 성차별 또는 불평등을 감지하며(=따지며) 산다는 건 귀찮고 피곤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인권도 그렇고 모든 '감수성'이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너, 나, 우리를 생각하면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예민하게, 더 예민하게, 촉을 세우고 자꾸만 피곤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날이 오겠지. 적어도 맥심 같은 헛발질은 좀 적어지겠지.


저자는 책에서 페미니즘을 "인간 세상 전체를 바꾸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했다. "여자도 사람이라는 급진적 개념"이지만, 이는 단지 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모두를 해방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특히 "인종주의와 마찬가지로, 여성 혐오는 피해자들만 나서서는 제대로 처리할 수가 없다"는 저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인간을 종별로 나누고 특정 인종, 일례로 흑인을 저열하다고 명명해 인종 간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인종주의'가 그나마 지금처럼 타파된 것은, 분명 당시 생각을 같이 하는 백인들이 앞장 섰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 읽은 책을 '페미니즘'이란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남자 지인에게 선물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