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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함께/취한 글들의 시간

순정의 부고

순정

  


비가 오고 마르는 동안 내 마음에 살이 붙다


마른 등뼈에 살이 붙다


잊어도 살 수 있을까 싶은 조밀한 그 자리에 꿈처럼 살이 붙다


풍경을 벗기면 벗길수록 죄가 솟구치는 자리에 뭔지 모를 것이 끊어져 자리라고 할 수 없는 자리에


그 짐승 같은 시간들을 밀지 못해서 잡지 못해서


살이 붙어 흉이 많다


          
- 이병률, '순정' 전문,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꿈을 꾸었다. 한 때는 그렇게 상처였던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지나 어느새 추억으로 곱게 아름답게 미화되고 만다. 그깟 인연 스쳐가면 그만이라고, 잠시나마 사람 사이 연을 쉽게 생각했던 어리고 어리석은 그 무렵 나의 탓이다. 관통하는 모든 인연(因緣)이 흉이든 훈장이든 뭔가를 '남기고야' 만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이것으로 앞으로 다가오는 인연에 신중할 수 있으니 어쩌면 가장 적당한 시점일 수도 있겠다. 전적인 긍정은 약속할 수 없지만, 어찌됐건 이제 그 기억은 지울 수도 없앨 수도 없는 견고한 흔적으로 내게 남았다. 그러니 이제 그만 놓아주었으면 한다. 정말로 이제 그만 놓았으면 한다. 잘 살아라. 이로써 그 순정에 마지막 안녕을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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