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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일상은 아름다워

그래도 살아야겠어요. 살아남았으니까 살고 싶어요.


어머, 아가씨는 젊은 나이에 왜 이렇게 많이 다쳤어? 교통사고야?

아... 그게 그러니까요, 낙상이요. 건물 4층에서 떨어졌어요.

건물? 아니 왜?

어... 그게. 저는 기억이 잘 안나는데 위경련이었던거 같대요. 그것도 똑바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떨어지다가 한번 다른데 부딪혀서 살았대요. 그래두 처음보다는 되게 많이 괜찮아진거에요.

아이구 어떡해...나이도 젊은데.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겠어.

네.. 처음엔 진짜 심각했는데. 지금은 옛날보다 많이 좋아져서요. 이제는 걱정 안하세요. 

-

이렇게 수십번 반복되는 대화들. 만나는 사람마다 묻는 저 말에 대답하면서, 나는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실은 남이 아닌 내게 하고 싶었던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많이 좋아졌어요. 그렇게 믿고 싶어요. 당신 눈에 나는 이리 불쌍하고 가엾겠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해요. 처음보다는 훨씬 좋아진거니까요.

삶은 이렇게 난데없다. 난데없어서, 총총 빛나게 잘살고 있던 스물다섯 여자아이의 양 다리를 꺾어 놓았다. 중환자실에서 지낸 18일 동안, 나는 온 몸의 피가 빠져서 죽는다던가 저어기 외딴섬의 병실에 갇혀 평생을 늙어간다던가 하는 말도 안되는 악몽들을 줄지어 꿨다. 무서웠다. 침대 위에 누워 온 몸이 묶인채 눈만 껌뻑거리면서도, 밤새 꿨던 악몽들이 현실인줄 착각해 면회온 가족들에게 살려달라 헛소리를 하곤 했지. 그래, 그랬었다. 그러면서도 끝내 살아남았다.


- 아빠 잠들면 안되, 나도 안잘거야, 자면 죽는단 말이야. 무서워 아빠. 나 잠들까봐 너무 무서워...


일반 환자실에 올라와서도 나는 저 따위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이를 악물고 밤을 샜다. 마음 약한, 어려서부터 유독 딸을 아끼던, 착하고 여린 우리 아빠는 결국 저렇게 말하는 내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었더랬다.
 

- 성애야 아빠 못 믿어? 믿으라는데 왜 자꾸 이래. 아빠 허락없인 아무도 널 못 건드려. 아빠가 그 정도도 못할 것 같아? 니가 죽게 아빠가 내버려두겠어? 아빠 한번만 믿고 자자. 푹 자야지 피가 돌고 그래야 몸이 빨리 낫지. 


상상도 할 수 없게,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한 딸을 보며 그저 참담했을 아빠와 엄마, 그리고 오빠. 혹시라도 잘못 되는 건 아닐까 마음 졸였을 친구들과 승호, 함께 기도해주셨던 교회 분들을 생각한다. 그때 그들의 마음결을 따라가다보면 눈물겹다. 죄송스럽다. 참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고, 눈물 흘리게 하고, 힘들게 만들면서 나는 잘도 모르고 있었구나. 잘도 잠만 자고 있었구나 하고.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때, 부모님이 나와 오빠 이름으로 드리던 일천번제 기도가 끝이 났다. 3년 넘게 걸리는 그 기도가, 마침 그 상황에서 끝이 났다. 추측건데 사고 당시의 병명이 위경련이고 허면 분명 배를 잡고 떨어졌을 것인데, 턱뼈가 부러지고 이가 몇대 나갈 정도면 굉장히 큰 충격이었을 것인데.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머리와 허리, 내장기관들을 다치지 않았던 것이 아빠 엄마의 저 기도 덕분이라고 나는 그리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있다. 

하나님, 살려주신거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살려주실거면 처음부터 안 떨어지게 좀 해주시지. 왜 굳이 떨어뜨려놓고 다시 받으셨나요. 이것 참...(이라고 나는 건방지게도 생각한다. 원망하는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는 얘기예요 흠...)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든 아직 할 일이 있어서든 어떻든. 그러나 그 사실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살아남아서 나는 아직 오른쪽 다리 수술을 더 해야하고, 아픔을 참아내야만 하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내 앞에 놓여진 무게들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어느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처음엔 그게 너무 억울했다. 사고라뇨? 저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 사고를 당했다뇨? 뼈가 부러져서 걸을 수 없다고요? 아프고 몸에서 자꾸 열이 나요.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데 책임은 제가 다 져야한다니, 그런게 어딨어요...

'인생의 현란한 반전'이라고 멋들어지게 얘기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아직도 몇날 며칠을 병원에서 견뎌야 하니까. 싫더라도 어쩔 수 없다. 부서진 뼈가 붙고, 붓기가 빠지고, 다시 한번 수술을 한뒤 살이 다시 차오를 때까지는 이 곳에 있어야만 한다.



....그래도 살아남을 거야, 끝내 그럴거야, 결심하곤 한다. 몇달 전만 해도 나는 분명 걷고 뛰어다녔었는데 어느날 잠을 깨니 그럴 수 없다니 황당하지만, 멀쩡했던 얼굴이 부서졌고 나으려면 아직도 더 치료받아야 한다니 짜증나지만. 그래도 살아남을거야. 살아남아서 꼭 다시 평범해지리라고. 평범하게 취직도 하고 평범하게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그러면서 남은 생을 충실히 살겠다고. 


지난 몇 개월간 일어났던 사건과 경험했던 일들이 앞으로 내 삶에 어떤 형태로 자리잡게 될지 아직 모르겠다. 왜 하필 나였는지, 왜 굳이 그때 거기서 떨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삶과 죽음의 틈새가 어디인지, 신의 뜻이 무엇인지, 우린 영원히 궁금해하지만 결코 알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충실히 흐르고, 봄은 다시 찾아오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그래. 시간은 충실히 흐르고, 봄은 다시 올거고, 나도 다시 걷게 될거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내 곁에 있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더도 덜도 말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제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래 이렇게라도 나는, 살고 싶으니까. 살아남아서, 살아야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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