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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함께/영화와 음악과 별과 시

돌아보면 그 어떤 타인도 항상 나의 일부였다


 
 요즘 자꾸 마음이 허하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데도 그렇다. 뭔가 본질이 아닌 주변부를 사는 듯한 이 느낌. 근데 복잡하고 어려운 내마음 읽어내기도 귀찮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고 있다. 에헤- 함께 얘기하면 좋을 것 같은 사람이 있긴 하지만. 막상 만나면 또 하릴없이 소소한 얘기만 하다 헤어질 것 같아서 연락도 하지 않고 있는 상황. 답답하구마잉~ 


 그건 그렇고. 학교 근처 북카페에서 이 책을 야금야금 읽었는데- 윤대녕 아저씨의 힘!을 발견했다고 해야하나. 한번에 집중해서 읽은것도 아니고 그냥 시간 날때마다 가서 읽은 책이었는데도, 읽을 때마다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장난 아니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한 남자의 위태로운 일생을 따라가면서, 때로는 타자화되는 여성들이 아쉬웠지만 또 한편으론 그의 인생이 오롯이 이해되곤 했다. 눈에 보이는 듯한 묘사와 삶에 대한 서늘한 통찰이 겹쳐져 깊은 인상을 남겼던 책. 


 아침에 학교에 오면서 김형경의 '사람풍경'을 읽었다. 때로는 내 심리를 너무 잘 읽어내서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내가, 내 친구가,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던 책. 아직 다 읽진 않았지만... 예전에 이 분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었을 때처럼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다. 알 수 없이 나타나는 내 이런 자아분열도 결국 어린 시절의 결핍,이 문제는 아닐런지. 아침마다 울며 매달리는 날 떼놓고 일하러 가던 엄마가 문제는 아니었는지. 근데 그렇거나 말거나, 결국 모든 해결책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어깨가 무겁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감정의 파편들. 나는 좀 더 야하고 뻔뻔하게, 화내며 살아야 한다고 결심. 


 비가 온다. 오늘 하루도 어제처럼 습하겠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윤대녕씨의 글만 실을랬는데 일기를 써버리고 말았지만 쩔 수 있나. 삶이란게 다 그렇게 예측불가능하게 흘러가는 거다 으하하. 이제 윤대녕씨의 글을 같이 읽어보아요. 이 분 글의 통찰이, 결핍이, 불완전함이 저는 참 좋더라구요 :)  





 '미란', 작가의 말, 윤대녕

 '97년 겨울과 2000년 봄에 나는 동남아를 여행했다. 한 번은 길게 한 번은 짧게. 돌아보니 '97년과 2000년의 내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모두 나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처음 미란을 만났을 때 그 사람 안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을 미지의 또 한 사람이.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도 실은 그 사람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조차도. 또 다른 낯선 이의 그림자가 그 사람 내면 깊숙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너는 내게 있어서 종종 네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느낌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릴 때가 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거울을 볼 때마다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나는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

 이 소설엔 성은 다르지만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의 미란이 등장한다. 나는 이들을 통해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불특정 다수에 대해 얘기하려 했다. 또한 이들이 결국엔 동일인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돌아보면 그 어떤 타인도 항상 나의 일부였다. 내가 들고 있는 거울에 비친 사람은 비록 내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인 동시에 엉뚱한 타인과 동일한 존재이기도 하도. 그렇다는 것을 때때로 삶이 나에게 알려주곤 했다. 그토록 많은 것을 상실해 가는 도중에.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소설은 남북 관계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작년에 동남아에서 돌아온 직후 나는 제주도에 내려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와중에 한일문학작가회의에 다녀와 계간 [문학과 사회]에 연재를 하게 되었다. 때마침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소설의 중반부는 안개가 많던 계절에 강화도에서 썼고 마지막 부분은 무더운 속초의 온천에서 썼다.


 다 쓰고 나서는 잠시 일본에 가 있었다. 9월의 일본은 더웠다.

 가을비가 계속 내리면서 뼈가 춥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온종일 두렵다. 그렇기는 해도 깨끗하고 사나운 적이 좀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그들과 싸우는 힘으로 살아낼 터이니까.

 미란, 너는 비와 함께 오더니 비와 함께 가는구나.

                                                                                                                              2001년 늦가을, 윤대녕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