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대와 함께/취한 글들의 시간

그토록 소중한 삶을 위해, 당신이 해야할 일?


-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 올라갈 수 있을까? 올라가야만 하는걸까?


얼마 전 한국 친구와 대화 중 우연히(라기 보단 필연히? ^^) 취업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지금 호주에서 인턴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데, 잘하면 아예 그쪽으로 취업 할수도 있다더라구요. 얘길 들어보니 사실 해외 취업은 그 친구 계획에 없던 선택이었나 봅니다.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도 따로 있고 또 성격상 더 역동적인 일을 원하는데, 요즘 취업하기가 워낙 힘이 드니 그 일자리를 진지하게 고려하는것 같았습니다. 천천히 생각하고 잘 결정하라고, 결국은 네 선택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말았죠.
 
그 친구 말하기를, 아직도 한국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부정하고 싶었지만 틀린 말은 아닌 듯 싶었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미처 몰랐던 사회의 구조와, 대학에서 맺어지는 '학연', 거기서 파장되는 '인맥', 또 피로써 뭉친 '혈연'까지... 개인적으로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들리는 이야기들은 참 다르더군요. 그저 건너 건너 들은 '카더라 통신'이 아닌, 친구들 자신, 또 그 친지들의 이야기라 더욱 설득력있게 들렸습니다. 

이런 사회에 발을 담그고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당장 내년에 취업을 어느 방향으로 잡아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이런 저런 고민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비단 이건 제 고민만이 아닌 구직자 모두의 고민이겠죠. 그래도 일단은 풍파에(?) 흔들리지 말고
'먹고 살 수 있는 한에서 가슴 뛰는 일을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생계를 꾸려가는 것, 가장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삶의 방식인데... 이것 자체가 어려워진 요즘 현실이 참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저희 윗 세대를 비롯해 어느 세대에게나 취업은 힘든거였겠지만, 특히나 요즘엔 전세계적 경기 침체에 한국 내에선 말도 많고 일도 많잖아요. 인터넷으로 읽는 한국에 대한 뉴스는 죄다 우울한데다 집안 안팎으로 시끄러우니 (예비)구직자로써 괜히 억울하기까지 합니다. :( 
 
그러던 중, 홍세화 씨의 강연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예전에 어디선가 듣고 심하게 공감했던, '자아 실현과 생존 사이에서 긴장하라'는 말이 이 분의 말이었네요. 하긴 예전에 진보신당 주최로 학교에 강연 왔을 때도 비슷한 말을 하셨습니다. 스스로 항상 '왜?'라고 묻는, 왜?를 살리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했죠.

그와 더불어 대학생들이 꼭 해야할 일로
1) 폭넓은 독서  2) 열린 토론 3) 경험, 여행을 통한 직접견문 4) 성찰 5) 늘 물음표를 던질
을 요구하셨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내가 확신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할 것. 합리화하지 말 것. 

 
자아 실현과 생존 사이의 긴장감, 제가 원하는 이상적인 취업은 요 둘 중간의 어디쯔음~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게 관건인데 요게 참 쉽지 않겠죠. 아찔한 줄타기라도 하는 기분이네요. 어쨌거나, 아래 글은 2년쯤 묵은 기사인데다 홍세화씨의 성향이 강하게 묻어나는 글이긴 하지만 2009년을 사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적용된다고 생각해 갈무리합니다. 글이 길어 중간 중간 짤랐습니다. 

 

   My cubicle, updated
   My cubicle, updated by Royal Sapien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그토록 소중한 삶을 위해, 시대에 불온하라"  - 오마이뉴스 (원본 링크)
-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의 대학생들에게 보내는 당부

"우리사회 사람들은 보통 두 번 긴장을 하죠. 대학입시 때와 취업할 때입니다. 그런데 대학은 공고히 서열화되어 있고, 또한 물신주의에 휘둘려 취업하는 현재 이 긴장은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라기보다 주류가치관에 따른 속물적 긴장이라고 봐야겠죠."

"속물적인 가치관에 얽매여 살면, 다른 사람의 삶도 똑같이 속물적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호화 아파트 광고가 있죠? 만약 우리가 그 말을 쪽방촌에 사는 이들에게 적용한다면 어떨까요. 이런 광고문구가 버젓이 방송을 탄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저급할 뿐만 아니라 폭력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데, 결국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타자의 삶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죠. ... 결국 자신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영합하지 않아야, 속물적인 주류 가치관에 의탁하지 않아야 하며, 이는 곧 사회에 불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홍씨는 이어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 만연한 우리 사회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삶은, 몸과 의식으로 나뉠 수 있죠. 상태로서의 몸은 건강을 추구하며, 지향으로서의 의식은 균형을 지향합니다. 몸에 대한 관심은 우리 사회에 상당히 높은 데 비해 의식에 대한 관심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가 없어요. 리영희 선생은 <대화>라는 대담집에서, 중학생 때 자신의 균형된 의식을 찾기 위해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에 파고들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제 자신 세대들도 어설펐지만 삶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어설픈 고민조차 찾기가 어려워진 것이 사실입니다."

"몸은 건강하지 않을 때 아파하는 자각증세가 있는데 의식은 균형을 잃어도 아플 줄 모르니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고 의식의 중요성을 역설한 홍씨는 "몸은 자신이 허락받지 않으면 건드릴 수 없는데, 의식은 나를 둘러싼 사회가 계속 건드린다"며 '사회화 과정'에는 "개인의 삶을 위한 것도 있지만 자신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요소도 분명히 있다"고 말하며 "비판적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끊임없이 나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홍씨는 의식의 기본속성으로 이런 현상을 풀이하기 시작했다. 한 번 형성된 의식은 그 의식을 계속 고집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합리화하려는 동물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연립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간 <한겨레> 독자들 중 절반은 조·중·동으로 신문을 바꿉니다. 사은품, 무료구독 등 보수신문들의 집중공략에 따른 것이죠. 그런데 신문을 옮긴 독자들의 대부분이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한겨레>가 예전같지 않다' '볼 내용이 없다' 등의 얘기를 하면서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입니다."

"의식을 고집부리지 말고 계속 회의해보라. 그리고 합리화시키지 말고 합리적 동물이 돼라"고 당부한 홍씨는 '나 자신이 주도하여 의식을 형성하는 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일단 책을 많이 읽음으로써 여러 시대의 생각에 대해 알아야 하고, 열린 토론을 통해 동시대 다른 생각도 접해보고, 여행 같은 다양한 직접경험으로 실제 부딪혀 본 후, 마지막으로 자기성찰을 통해야지 올바른 의식형성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책을 도통 읽지 않고, 토론할 때 자기 생각을 그저 확인하려만 들고, 동아리들은 다 죽어간 현재 대학생들의 의식은 '자기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홍세화씨는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긴장하라"고 당부했다.

"자아실현과 생존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해야 합니다. 사회에 나가며 자아실현과 생존 두 측면을 동시에 가지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제발, 생존을 위해 자아실현을 양보만 하지, 포기하지 마세요. 옛 세대, 우리 세대, 그리고 끊임없는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자아실현 자체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길입니다.

앞으로 끊임없이 여러분은 '소유'로 비교당할 것입니다. 절대 인간됨과 인격으로 비교하지 않아요. 소유로만 비교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가치관이 당당하다면 끝까지 그 가치관을 지켜가십시오. 그래서 기어이 사회가 여러분의 그 무한한 능력을 무시할 수 없도록 하십시오. 왜? 바로 그토록 소중한, 여러분의 삶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