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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함께/'인간적'인 만남

한열아, 이놈아, 장하다 내 미운오리새끼…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지만, 오늘만큼은 꼭 포스팅을 해야겠다. 6월 9일, 내일이 바로 이한열 열사의 기일이며 모레는 87년 6.10 항쟁이 25돌을 맞는 날이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을 뒤집고 민주주의를 이끌어낸 6월 항쟁, 그 도화선은 바로 연세대 이한열 열사의 희생이었다. 그는 국민평화대행진(6·10대회)을 하루 앞두고 이 대회에 출정하기 위한 시위를 연세대 앞에서 벌이다가, 경찰의 최루탄에 뒤통수를 맞는다. 그 과정에서 뇌손상을 당한 열사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7월 5일 심폐기능 정지로 사망하고 만다. 


  
▲ 정태원 기자가 찍은 당시 사진.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이한열
ⓒ 정태원
 이한열


스물한 살 여대생, 동갑내기 '이한열'을 만나다

나와 이한열 열사는 알게 모르게 인연이 얽혀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새내기 시절, 당시 활동하던 흑백사진 동아리에서 '풍자'란 주제로 사진전을 열었다. 나는 그가 쓰러지는 사진을 패러디한 작품을 냈다. 원본 사진은 6월 항쟁 때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이한열, 내 작품은 술에 취해 술병을 붙잡고 쓰러지는 대학생 사진이었다. 사진집에 들어간 설명은 다음과 같다. '대학새내기. 나는, 술집중흥과 MT섭렵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대학에 들어왔다?' 

그러나 지금에서 돌아보면 참, 몰라서 용감했다는 생각도 든다. 갓 대학에 입학했던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어렴풋한 인식만 있었을 뿐, 사건을 둘러싼 전후 맥락과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는 한참 모자랐기 때문이다. 뭣도 모르고 풍자를 한 셈이었다. 


  
▲ 교내 사진전 때 찍은 사진 옆에서. 풍자를 확실히 하기 위해 원본 사진을 옆에 붙였다.
ⓒ 유성애
 이한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더욱 신기했다. 평소 존경해왔던 언론인 MBC 이상호 기자의 책 <그래도 나는 고발한다>를 읽던 중, 연대 출신인 이 기자도 당시 이한열 열사와 함께 시위에 참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놀라운 건 열사의 바로 뒷줄에 서 있었다는 것. 책에는 '한열이 형'이라 말하며 그 상황을 회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직도 나는 이한열의 짐을 벗지 못하고 있다. 그가 쓰러지던 6월 9일은 오늘 우리 시대 새 역사를 열어준 6․10 항쟁의 전야였다. 이한열은 가장 앞줄에 섰다. 철저하지 못했던 나는 바로 그의 뒷줄에서 어깨를 걸었다. 스크럼(여럿이 팔을 바싹 끼고 횡대를 이루는 것)을 짰다. 이한열은 내게 한 발 더 앞서 걷는 자의 숙명적 고독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는 둘째 줄로 날아온 최루탄을 그의 몸으로 막아주었다. '그가 내 앞에 없었다면'이라는 가정법은 뒤에 선 자의 안락함과 비겁을 거부하라는 경계로 내 안에 각인되었다. '앞장서는 삶'. 이한열이 숨진 87년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 <그래도 나는 고발한다>중  '사람, 세상을 열어주는 문', 이상호, 문예당
 
일련의 사실들을 알게 된 뒤로 열사에 대한 이해와 존경심이 더 깊어지는 걸 느꼈다. 물론 20대 젊은이의 죽음은 그 주인공이 누가 됐든 슬프겠지만, 민주화를 위한 순수한 열정을 지녔던 대학생이 그렇게 쉽게 스러져야만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민주화란 결실로 나타났다.
ⓒ 이한열기념사업회
 이한열


손석춘 씨의 소설 <아름다운 집>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사회로 이미 난 들어섰다. 오늘의 조선이 대학인에게 요구하는 지식인의 책임 앞에서 결코 뒤돌아보거나 옆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회가 대학인에게 요구하는 지식인의 책임. 지금 대학생으로 살아가는 친구들은 이런 질문들을 고민해볼 기회나 있었을까. 사회는 이제 '지식인의 책임'보다는 '생활인으로서의 스펙'을 요구하는 것 같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먼저 간 당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25주년을 맞아 오늘 저녁 연세대에서는 '이한열 열사 추모제'가 열린다고 한다. 연세대 교내에 민주화 운동 사진전이 열리고 학생회관 옆 한열동산에서는 헌화도 할 예정이라고. 더불어 박원순 서울시장 또한 대강당에서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강연을 열 계획이다. 서울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도 행사가 열린다. 오는 9일에는 부산지역에서 '민주열사 합동 추모문화제'가, 10일에는 민주항쟁 기념식도 있을 예정이란다. 


  
▲ 연세대에서 예정된 추모제 '한열, 민주주의에 색을 입히다' 포스터.
ⓒ 이한열기념사업회
 이한열



바쁜 일상에 추모 행사까지 참석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한열'을 비롯해 민주화 과정에서 스러져간 안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한번쯤은 떠올렸으면 싶다. 그를 기억하고 그들의 맑은 뜻을 잊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 그들이 피 흘려 이뤄낸 '민주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 아닐까. 당시와 관련된 사진과 편지를 덧붙이며 글을 마친다.   


  
▲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열사를 친구들이 부축하고 있다
ⓒ 이한열기념사업회
 이한열



  
▲ 열사는 곧바로 병원에 후송됐지만, 한달뒤 끝내 사망하고 만다.
ⓒ 이한열기념사업회
 이한열


  
▲ 열사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 장하다, 보고싶다 내 미운오리새끼.
ⓒ 이한열기념사업회
 이한열


  
▲ 역시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의 헌사
ⓒ 이한열기념사업회
 이한열


(이한열) 어머님께 드리는 글

오늘도 저는 병원 3층 복도 한 구석에서 우리의 친구 한열이의 회복을 빌며 밤샘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바쁘신 중에도 안녕하신지요. 진실을 말하고 최소한의 권리를 얻고자하는 우리의 외침마저도 이제는 목숨을 내걸고 해야 합니다.

며칠전 친구 한열이의 일을 당하고 나서 너무나 큰 슬픔과 충격에 허둥지둥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우리의 자유, 우리의 진실을 찾아 나서야 할 때입니다. 많은 시민들이 자유와 진실을 외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학생들도 시험을 연기하고 여기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염원하던 민주사회, 사람사는 세상은 이제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아직은 때묻지 않은 소박한 양심이,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이 나라의 역사가 저희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어머님, 저희 모두는 어머님 아버님의 소중한 자식들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인 것이지요.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 사랑하는 우리 어머님, 우리 곁에서 웃고 울며 함께 분노하고 정의를 온몸으로 부여안으려던 친구 한열이가 그것을 완전 부정하려는 세력들의 반인간적 폭력에 의해 지금 병실 한 구석에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지성,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위선이다"라고.

이 말은 바로 오늘의 상황을 기다리며 오래오래 초조하게 간직되어온 이 시대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나서 어머님을 그리 즐겁게 해드리지 못하고, 일찍일찍 들어오라는 말씀을 어겨 밤이 깊어서야 들어가 어머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저는 불효자였습니다.

어머님, 저는 불효자입니다. 앞으로도 불효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떳떳하고 자랑스런 불효자가, 아니 불효자일지라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설 것입니다. 어머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결코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려 합니다.

- (한열의 친구) 당신의 아들 올림.   출처: 이한열 기념관

* 이한열 열사 온라인 기념관 http://www.1987060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