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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함께/취한 글들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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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어린 여우를, 이따금 나타나는 사슴을, 그해 처음 만나는 제비를, 풀밭이 초록빛에서 황금빛으로 바뀌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다. 밤에 가만히 앉아 눈에 보이는 사천오백 개의 별을 하나씩 세어보고 싶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이 모든 것을 하고 싶다. 그래서 침묵이 내게 다가올, 내 안에 깃들 기회를 얻고 싶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정말 모른다. 가끔은 침묵이 블랙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블랙홀에서는 중력이 워낙 강력히 작용하여 무엇도, 심지어 빛조차 그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블랙홀은 그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돌이킬 수 없이 끌어당기고 빨아들여서 그 자체의 덩어리로 응축될 때까지 압축하고 쥐어짜고 다진다. 시간도 느려진다. 한번 시작되면 느린 화면을 보는 듯 어떤 ..
"내 삶은 죽음이 연장해 주고 있다." 죽음의 예술가 사회부에서, 죽은 사람에 대한 사망 기사만 맡아 쓰는 사람이 있다. 알덴 휘트먼 기자이다. 유명 인사가 세상을 뜨면 그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기사로 쓰는 일. 그래서 '추모사 전문'이라는 별명이 늘 붙어 다니는 알덴 휘트먼은, 나름대로 그 일에 대한 정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충성심이다. 이제 예순이 되어가는 나이의 그는 평생 아내 조안에게 큰소리 한 번 안 쳤을 만큼 조용조용한 성격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치열하다. 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사이, 그의 머릿속은 벌써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타임스 스퀘어의 사무실에 들어선 그는 먼저 아침 신문들을 뒤적여 누가 입원을 했다거나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기사들을 추려 읽는..
2014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추운 겨울이 싫다. 겨울이 지나야 봄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싫다. 손발이 차서 추위를 잘 못 견디는 내 탓도 있지만 그보다도 가뜩이나 추운 사람들 더 춥게 만드는 게 싫다. 어제 오랜만에 세월호 광화문 농성장에 갔는데, 밖으로 거세게 이는 바람에 천막이 무너질까 겁날 정도였다. 사고 이후 누구보다 친해진, 각기 아들을 잃은 민우아빠와 영석아빠는 큰 겨울코트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농성장을 비울 수 없으니 거기서 잔다고 했다. 정부가 지난 11일 실종자 수색작업을 종료하겠다고 발표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정부에 수색중단을 요청했다고 한다. 우리 아빠, 내 딸, 내 동생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돌아서면서도 "누군가에게 고통이라면 저희가 수중수색을 내려놓겠다"고 한다. "저희 결정으로 인해 정부의 고뇌도..
최초의 경이, 박완서 이미 가을이 깊었습니다. 엊그저께는 친구하고 전화하다가 단풍 얘기가 나왔습니다. 지리산 청학동의 어느 골짜긴가에 기막히게 아름다운 단풍길이 있었답니다. 그 길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 저러하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우리 집 부엌 창문 밖으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보였습니다. 그날 갑자기 물든 게 아니련만 내눈에 띈 건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며칠 있으면 으스스 몸을 떨며 그 고운 잎을 아낌없이 떨구겠지요. 은행나무가 헐벗고 나면 그 밑의 보도가 얼마나 아름답고 푹신한 황금빛 융단을 깔게 되는지 우리는 압니다. 가을은 이렇게 우리가 마중을 가도 오고, 안 가도 옵니다. 기다려도 오고 안 기다려도 옵니다. 그러나..
순정의 부고 순정 비가 오고 마르는 동안 내 마음에 살이 붙다 마른 등뼈에 살이 붙다 잊어도 살 수 있을까 싶은 조밀한 그 자리에 꿈처럼 살이 붙다 풍경을 벗기면 벗길수록 죄가 솟구치는 자리에 뭔지 모를 것이 끊어져 자리라고 할 수 없는 자리에 그 짐승 같은 시간들을 밀지 못해서 잡지 못해서 살이 붙어 흉이 많다 - 이병률, '순정' 전문,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꿈을 꾸었다. 한 때는 그렇게 상처였던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지나 어느새 추억으로 곱게 아름답게 미화되고 만다. 그깟 인연 스쳐가면 그만이라고, 잠시나마 사람 사이 연을 쉽게 생각했던 어리고 어리석은 그 무렵 나의 탓이다. 관통하는 모든 인연(因緣)이 흉이든 훈장이든 뭔가를 '남기고야' 만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이것으로 앞으로 다가오..
4.5-3.72=0.79, 김태원 4.5-3.72=0.79 다양한 경험과 도전을 한다면서 공모전 하느라, 인턴하느라, 여행하느라, 발로 뛰며 기사 쓰느라, 엠티 가서 노느라, 미팅 하느라 잃어버린 학점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0.79가 제 인생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줬을 뿐 아니라, 책을 쓰는 데도, 구글에 입사하는데도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4.5 만점에서 얼마만큼의 학점을 따느냐로 갈라지기보다는, 4.5에서 여러분의 학점을 뺀 숫자를 어떻게 까먹었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모전을 준비하다가 팀원들과 겪은 갈등이 팀워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 계기였다고 말했고, 해외 여행을 하면서 생각의 프레임을 넓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굶주린 아이들이 저를 더욱 열심히 살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고..
모진 계절을 견딘다는 것은 대체 어떤 걸까 하고. … 그러던 그녀가 이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애지중지 키워오던 연꽃 봉오리가 거친 소낙비를 맞아 뚝뚝 잎을 떨어뜨리던 어느 날에. 제대로 피지도 못했는데 잎을 자꾸만 뚝뚝 떨어뜨리는 연꽃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비를 맞고 서서. 모진 계절을 견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걸까 하고. 그녀가 자꾸 이런 생각을 한다. 연꽃이 뚝뚝,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할 수 있는 게 왜 하나도 없을까 하고. 이렇게 소중한 것이 함부로 지지 않도록, 잘 지킬 수는 없는 것인가 하고. 뚝뚝 떨어지는 연꽃잎을, 쳐다보고 있어야 할지 눈 감아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그녀는 갑자기 사진을 찍기로 한다. 쪼그리고 앉아서, 떨어진 잎들에 포커스를 맞춘다. 슬퍼보이게 하려고 앵글을 잡는다. 뷰 파인더 안에는 지난 계..
지금은 투쟁중 그러니까 나도 '투쟁'중인거라 해두자. 자꾸만 속으로 파고들고 싶어하는 나와 사람으로 세상으로 넓어지고자 하는 내가 투쟁하고 있다고 하자. 다 그만두고 싶고 내팽개치고 싶은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도, 돌아보지 않는 인연들에게 다시금 말을 걸고 손을 내미는 것도, 맘껏 비판하고 제멋대로 비관하고 싶은 걸 참고 의지로 낙관하는 것도, 수많은 남들 가운데서 나를 어르고 달래며 지키는 것도, 다 투쟁이라고 치자. 그래 그리 해두자. 십대 때 나 혼자 조용히 국어사전을 펴들고 '사랑'이라는 말을 찾아보았다.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포켓국어사전에는 "중히 여기어 아끼는 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중히'의 무게감과 '아껴'의 애틋함이 전해져서, 그 뜻을 지금껏 중히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