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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배우며/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나영이 사건'이라 부르지 마세요


제가 인턴으로 근무하는 곳은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共感)'이라는 곳으로, 요새 국정원의 소송으로 화제가 된 박원순 변호사님의 '아름다운재단'에 소속돼 있는 단체입니다. 국내 최초에 게다가 비영리로 운영되고 있는 이 곳은 일곱 명의 변호사님들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법안, 한 마디로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공익법을 위해 일하시는 곳이죠. 암튼 그렇다보니 여기서 일하는 정시 인턴들도 법대생이거나 로스쿨을 준비하는 분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물론 홍보 기획팀에서 근무하는 저 같은 경우는 빼고요. 오늘 그 중 한명과 우연히 얘기를 나눴습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굉장히 논란이 되고 있는 '나영이 사건'에 대해서요.


- 야 너 그 얘기 알지? '나영이 사건'말야

만취한 50대 남성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하고, 결국 생식기의 80%를 손실한 9세 여자아이, 나영이(가명). 이 사건은 'KBS 시사기획 쌈'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제일 먼저 다뤄졌고 (기획의도는 여기) 그 뒤 인터넷을 통해 일파만파 퍼지게 되었습니다. 사건 그 자체로도 정말 충격적이거니와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해자 때문에 비난여론은 더욱 들끓어 올랐죠. 사건의 파급력과 저 어린 피해자가 정신적/육체적으로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가해자에게 내려진 12년 구형은 너무 적지 않냐는 것이 일반적인 대세인데, 나아가서는 이 사건이 참 많은 주제와 관련돼 있다고 느꼈습니다. 아동 성범죄의 처벌 기준과 그 강도, 사형제 집행에 대한 논란, 또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권은 어떻게 존중받아야 하는지.... 네티즌들도 그러했지만 저 또한 친구들만 만나면 '나영이 사건'에 대해 얘길 하곤 했습니다. 일단 저 사건 자체에 정말 어이가 없고 화가 났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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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밤 11시경, 일명 '나영이 사건'에 관한 기사들


- 언론, 꼭 그렇게까지 자세히 보도 해야하나

공감의 법대 친구는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1차적으로는 이 사건이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듣고서도 믿을 수 없는 그런 사건이어서 화가 났었지만 2차적으로는 이 사건에 대해 필요 이상의 선정적인 기사를 써내려가는 언론 보도에 한번 더 화가 났다고 말입니다. 하긴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습니다. 저도 기사로 먼저 접했는데 성폭행 과정이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돼 있더라구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봐도 모두들 '보면서 토할 것 같았다', '먹은 게 올라올 것 같았다' 등 격한 표현들을 하는 걸로 보아 이번 사건을 놓고 언론에서 너무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게, 자극적으로 보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어린 아이가 자라서 언젠가 이 사건을 돌아보게 될 때, 지금의 기사들을 읽고 어떤 충격을 받게 될지 상상해 보세요. 사람들의 관심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언론들이 스스로 먼저, 적절히 기사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청자와 독자의 알 권리 못지않게 피해 아동의 인권 또한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거니까요. 또한 그 가운데에서 언론의 중도는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건지, 그 방법과 기준은 어떤 것인지...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수 없네요.


- 그런데, 왜 하필 '나영이' 사건입니까?

언론의 선정적 기사 다음으로는, 이번 사건의 이름이 '나영이'로 되어있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잘못한 것은 가해자인데 왜 모두들 '나영이'사건으로 부르는 것일까요? 아무리 가명이라고 해도 이번 사건이 '나영이 사건'으로 회자되면 회자될수록, 나영이와 그 가족들의 고통은 계속될 것이 자명합니다. '시사기획 쌈'의 보도 후 회사로 나영이를 돕고 싶다는 시청자들의 문의가 쇄도했지만 나영이 아버님은 '더 이상 아이가 외부로 노출되지 않았으면'하고 밝히셨다네요. (제작진의 공지글은 여기)

또한 '나영이'라고 부르면 왠지 굉장히 친근한 동생같은 느낌이 들잖습니까? 친구는 바로 그 점을 지적했습니다. '나영이 사건'이라고 명명하면 아주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 뿐인가요, 예전에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잡히고 난 후에 무려 1100여건에 달하는 '강호순' 개명 신청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전국의 모든 강호순들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어 개명을 결심하게 된 웃지못할 상황이었지요. 나영이 사건도 그렇습니다.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특이하지도 않은 이름 '나영이', 그로 인해 같은 이름을 가진 또래 아이들이 입게 될 피해도 고려해 봐야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가해자의 이름인 '조두순 사건'으로 부를 경우에도, 조두순이란 이름을 가진 분들의 피해를 입게 될테니 그 또한 문제겠네요. '등교길 여아 성폭행 사건'쯤이 좋지않을까 가늠해봅니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런 이름 짓기의 파급 효과가 어디까지 미칠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분노에 앞서,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

이번 사건을 통해 인터넷상에서 아동성범죄자의 처벌과 신상 공개에 관한 논의, 사형제에 대한 논의 등 많은 토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긍정적인 현상일 수도 있겠지요. 이런 토론을 통해 구성원들의 사회적인 합의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런 부분에서 더욱 경각심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사건과 관련해 단순히 감정적으로만 화낼 것이 아니라, 법적인 부분에서 아동 성범죄에 대한 처벌 조항을 더욱 명확히하고 구체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저 한 사람, 가해자에 대한 분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결과물을 도출해야 한다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이 사건을 통해 가장 많이 상처받았을 사람들이 누구일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영이와 그 가족들을 한번 더 배려하고 존중해주는 마음, 이 또한 잊어서는 안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힘내시기를, 나아가 앞으로 제2, 제3의 피해아동이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붙임1) 드디어 관련 기사가 떴네요. 링크 걸어놓을테니 한번 읽어보시길...

"'나영이 사건'이 아니라 '조○○ 사건'입니다" (세계일보)
- "피해자 노출시키고 제2의 피해자 낳는 사건 이름 바꿔야" 주장 이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