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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배우며/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자식아, 나보다 먼저 죽어다오… 노모의 고백


 저녁 9시. 학교 도서관 문을 나서는데 비가 내렸다. 대동제 기간인 대학교 안은 축제 분위기로 한창 들떴고, 여기 저기 벌어진 천막 주점에서 학생들은 신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30년 전 오늘, 같은 시각의 광주는 아마도 달랐을 것이다. 5.18 기념재단이 출판한, 광주 민주화 운동 그 후를 담은 책 <부서진 풍경(2000년)>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책을 읽으며 나도 함께 울었다. 계엄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에 끝내는 자살로 생을 마친 여고생, 개머리판에 맞아 머리가 깨져 죽은 고등학생, 친척의 병문안을 가다가 영문도 모른채 잡혀간 대학생까지... 광주 민주화 운동의 휴우증은 이제껏 알아온 것보다 훨씬 깊고 고질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이 아프고 아렸다. 당시의 대학생과 지금의 대학생은 사회적인 요구도 위치도 다르겠지만, 눈 앞에 펼쳐진 술판을 보며 그 괴리와 시차에 기분이 착잡해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다인가. 그 날의 함성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한 사회 앞에서 한낱 개인은 무력하고 역사따라 변할 수 밖에 없는걸까.. 이런 무거운 물음들이 머리 속을 메워 어지러웠다. 어쩌면 나는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지도 몰라. 당장 취업도 못한 백수 주제에 무얼 그리 고민하느냐. 자조가 흘러나왔다. 

<부서진 풍경(2000년)>의 내용 중 기억에 남는 한 부모의 이야기를 발췌해 실어본다.


 

 
  
▲ 광주 30돌, 그날의 기억 계엄군이 시민군을 포위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27일 공수부대 진압 후 집계된 사망자가 160여명, 부상자는 3000여명에 육박했으며 실종자도 70여명에 달했다.
ⓒ 5.18재단
 

자식아, 이놈아, 먼저 죽어다오... 부모의 고백


* 김성철(가명) : 1962년 11월 7일생, 당시 고교생, 1980년 5월 19일 가톨릭 센타 앞에서 부상당해 현재 광주 시립성은병원에 입원 치료 중


 나는 지금 82살 노인이요. 그러고 저 불쌍한 자식은 올해 서른 여덞일 것이요.

 

  아들 셋, 딸 다섯이나 되는 자식 중에서 저놈이 바로 막내요. 내가 쉰이 다 되어서 나온 아이지라. 지금은 지 나이도 모르고 우리 두 늙은이 얼굴만 알아보요마는 그때까지는 참말로 대단했소. 천재 소리 들었지요. 동네 구멍가게 하나 해서 먹고사는데 뭔 공부를 시켰겠소. 근디 지가 그렇게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하니까 다들 서울대 갈 줄 알았지요. 80년도에는 저 놈이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디 전교에서 일 이등 했어요. 전국 모의고사에서는 10등도 하고 11등도 합디다. 전국에서 열번째 하는 자식이니 얼마나 대견했겠소. 그저 착실하고 조용하니 지 할 일 똑부러지게 하는 그런 아이였지요.

 

 근디 5.18이 나고 그 난리가 시작된 다음날인 19일 밤, 전날인 18일부터 통금이 저녁 8시로 당겨졌지요. 웬일인지 밤 8시가 지나 자정이 다 되도록 아이가 집에를 들어오지 않습디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더구나 지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군인들하고 시민들이 싸움을 하던 경계지역이라 내 맘이 미칠 지경이었지요. 그래도 아이가 워낙 착실한 놈이라 큰 일은 없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저 놈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란 말이요. 그런데 교복이 다 찢어져서 너덜너덜 해져있고 머리를 붕대로 칭칭 감았더라고요.

 

  속으로 지레짐작은 갑디다만 동네 사람들이라도 볼까봐 얼른 방으로 데려가지 않았겠소. 그런데 저 놈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기운이 하나도 없이 스르륵 쓰러져 버립디다. 그래서 내가 '너 머리 왜 그러냐' 하고 물으니까 데모하다 다쳤다는 말만 겨우 내뱉고는 눈도 못 떠요. 글쎄, 상처를 좀 보려고 하는데 피가 엉켜서 제대로 풀어지지도 않는데 머리 뒤가 찢어져 있습디다. 군인들이 갖고 다니는 방망이로 머리를 때리면 바로 찢어진다고 하던데 그런가 보다 하고는 연고만 발라 줬지요. 그때는 병원에 데려갈 세상이 아니었잖소. 내 자식 데모했소 하고 내 놀 부모가 어디 있다요. 그렇게 말했다간 내 아들놈 잡아가란 소리하고 똑 같았능게... 며칠 지나니까 상처가 아물어서 다 나았나 보다 했소. 19일 밤부터 휴교령이 내려 학교도 안가니까 집에서 가만히 있대요.

 

  
▲ 광주 민주화 운동 30돌, 그 날의 기억
머리에 피를 흘리며 연행되고 있는 남녀. 수많은 부상자와 사상자를 낸 1980년 5월 18일의 기억
ⓒ 5.18 기념재단
 

 괜찮은 줄만 알았는데… 이상해진 내 아들

 

 27일 군인들이 들어오고 나서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해서 별 일 없는 것 같더니 1주일쯤 지나니까 저 놈이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디다. 방문을 틀어 잠그고는 식구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요. 이따금 방안에서 '병아리 새끼들 다 죽인다. 나와!'하고 악을 쓸 때도 있어요. 내가 '병아리가 뭐냐?'고 물어보니까,

 

  "예! 병아리는 국군을 말합니다!"

 이렇게 큰소리로 군인처럼 말 하대요. 아이고, 저것이 왜 저러나, 도대체 공수부대들한테 얼마나 당했기에 저러나 싶어 기가 막힙디다.

 

 그런 상태로 1학기가 끝날 때까지 학교에 다니다 말다 해서 성적이 뚝 떨어져 버렸어요. 집 나가 밤을 새우고 들어오기도 여러 번 했지요. 속 모르는 담임 선생님도 애가 탔겠지요. 우리 아들놈이 왜 학교에도 안나오고 성적이 떨어지냐고,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하는데 난 아무 말도 못했어요. 그때는 세상이 좀 무서웠겠소! 혹시 데모한것 때문에 서울대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어쩔 것이요. 나는 가타부타 상대도 안해부렀지요. 근디 아이가 도대체 마음을 못 잡아요. 고등학교 3학년인 아이가 한 달 동안 집을 들어오지 않은 적도 있었어요. 저 놈이 말을 안하니까 어디를 쏘다녔는지도 모르죠. 모양이 마치 거지꼴입디다. (…중략…)

 

 그렇게 일년 가까이 허송세월 했어도 워낙 머리가 좋으니까 조선대 의대에 장학생으로 합격합디다. 서울대만은 못해도 의대가 어디요? 의사 아니요! 참 기분 좋습디다. 근디 이놈이 입학하고도 학교를 갔다 안갔다 지 맘이어요. 의대생 모임에 들었는지 학생들이 찾아와도 대꾸는커녕 입도 벙긋 안하고 눈도 한번 마주치지 않고 어째 아이가 갈수록 이상해요. 그때 우리는 조그마한 슈퍼마켓 하나 차려서 먹고 살 때인데 낮에는 늙은 부모 도와서 물건도 팔고 밤이 되면 2층 다락에 올라가 생활을 했는데 밤중에 가만히 들어보면 잠을 자지 않고 혼자서 중얼중얼 거려요.

 

 "나는 김성철이다. 김성철이는 용감하다. 김성철은 절대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다."

그 말만 꼭 중 염불하듯이 몇 시간이고 계속 반복해대더란 말이요. 한달 내내 같이 학교 가자고 데리러 오는 학생들 보기가 미안해서 우리 아이 상태가 좋지 않으니 오지 말라고 했소. 도저히 안되겠기에 아이를 데리고 조선대 병원, 전남대 병원에 가서 진찰 받았지요.

 

 '정신 분열증'이랍디다. 기가 막힐 노릇입디다. 근데 전대 병원 과장이 정신병 환자가 90명일 때 다 치료를 끝내도 30명 정도만 회복할 수 있다 그래요, 우리 성철이는 심해서 치료해도 낫는다는 보장을 못한답디다.

 

 억장이 무너지고 다리 힘이 쫙 빠져버리데요. 누구를 원망해야 할 지 모르겠습디다. 정치가 뭔지 나는 모르요. 자식이 하도 많응께 죽어라 일해도 키우기가 힘들어서 딴 생각할 여유도 없었어요. 그래도 늘그막에 생긴 막내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돈도 안 들고 부모 속 안 썩이고 장학생으로 의대까지 갔는디, 그래서 저것 키우는 재미로 내 맘이 항상 뿌듯했는디…, 내가 어디다 항의를 할 수가 있었겠소. 전두환이가 정치를 꽉 잡고 있어 세상이 얼마나 살벌한데…. 정말 하늘이 원망스럽습디다. 의사한테조차 고3때 공부하다 미쳐부렀다고 했소.

 

  
▲ 광주 30돌, 그날의 기억 시간이 지나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일반 시민들, 우리와 똑같은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잊지 말아야할 역사적 사실이다.
ⓒ 5.18 기념재단
 운동

 

 성철이는 이 세상이 싫었을 것이요. 너무너무 힘들어 보였어요. 눈 뜨고 감는 것, 입 벌리고 닫는 것 밥을 꿀떡 삼키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입디다.  … 퇴원은 시켰지만 집에 데리고 있기도 불안합디다. 사람만 보면 난폭하게 달려들고, 그때부터는 가족도 이미 못알아 봅디다. 혹시나 칼로 사람이라도 상하게 할까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지키는데 안심할 수가 있어야죠, 어쩔 수 없이 나주 정신 병원에 입원시켰다가 한 달만에 퇴원시키라는 기별을 받았어요. (…중략…)

 

 내 나이 여든, 아들아 부디 나보다 먼저 죽어다오…

 

 5.18때 데모한 사람이 우리 자식 뿐이었겠소? 우리 애가 운이 없어서 다친 것을 어쩔 것이요. 다른 사람은 더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멀쩡합디다만 그 아이가 워낙 순하고 어려서…,그리고 못나서 그런 것을 어쩔 것이요. 그저 5.18 단체들 덕분에 이나마 병원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싶어요. 근디 마음이 심란한 때는 나도 미칠 것 같아요. 내 자식이 사람이 될 수 있겠소? 나을 수 있냐 말이요!

 

 나는 걱정이 하나 있소. 우리 부부가 죽고 나면 저것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거요. 나는 지금 협심증이 있어요. 병원 약으로 살고 있고 집사람은 퇴행성 관절염으로 잘 걷지도 못하고 기관지도 나쁘요. 우리 부부가 살면 얼마나 더 살 것이요? 다른 형제들이야 제 살 길도 바쁘니 누가 저 아이를 챙겨줄 것이요. 그러니 내 소원은 저것이 내 앞에 먼저 죽어주길 바라는 거요. 지가 5.18부상자라는 것도 모를 정도인데 부모만 알아보니 우리 두 늙은이는 무슨 죄다요. 어떤 부모가 자식 나중에 죽고 싶겄소.

 

 내 나이 여든이요, 여든


 
 - 발췌: 부서진 풍경 (2000년 5월 10일 발간/ 기록인 문병란, 전용호) 5.18 기념재단 출판

 

 

 

 지금 대학을 다니거나 휴학/복학생인 학생들은, 이미 민주화된 80년 중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광주 운동에 대해서는 교과서로 배우고 시험용으로 외웠을 뿐 당시 분위기가 어땠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그들이 대체 뭘 위해 그리 희생했는지에 잘 알지 못한다. 부끄럽게도 나 또한 그래왔음을 인정해야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관련된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보며- 저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도 살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여 망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들의 피로 얼룩진 땅에 이 땅의 민주주의가 뿌리를 딛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일 것이다.

 

 30년 전의 5월 19일에도 광주엔 비가 내렸다고 한다. 비극의 27일, 공수부대를 앞세운 계엄군의 만행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 때 일어났던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미 그 자체로 역사의 진보였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여전히 고통받고 있을, 부상자를 비롯한 고인들을 추모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