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있었다. 두 남자를 잃었다. 아버지와 연인, 그 둘을 잃고 세상에 남겨진 여자는 과연 살고 싶었을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그것도 코 앞에서 목격해야했던 여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갈 수 있었을까.
'Emotion' 인간의 감정이란 대개 유한하며 상시 변하는 것이어서 대체로 환영받지 못한다. 어제의 나만 해도 그랬다. 삼분의 일을 겨우 넘긴 가혹한 과제점수 앞에서는 우울했으나 'Bye Gorgeous,'하고 손 흔드는 버스아저씨 얼굴에 기분이 좋아졌고, 내 일을 자기 일마냥 함께 걱정해주는 폴렛Paulette의 다정한 눈을 보니 스르륵 용기가 났다. 한 입 베어물고 놔두면 금새 변하는 사과의 색깔처럼, 물컵에 물감 한 방울 툭 떨어트릴 때의 그 순간처럼- 감정이란 녀석은 빠르고 빈틈없게,어느새 그렇게 바뀌어있다.
“No emotion, any more than a wave, can long retain its own individual form.”
- Henry Ward Beecher
그 어떤 희로애락의 감정도 제 고유한 모습을 오래 간직하지 못한다. 마치 파도처럼, 혹은 그보다 더.
행복을 꿈꾸던 주인공 H, 그러나 결국 그의 선택은-
Happiness 꼬박꼬박 학교에 가고 열심히 공부해서 H가 얻게 된 보상이란 고작 학교를 더 오래 다니는 거였다. 마침내 증권 회사에 취직한 H 앞에 놓여진 삶이란-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변화란 없는 무서울만치 안정적인 삶. ‘직업과 돈, 보장된 미래’라는 행복의 3요소를 모두 갖춘 환경에서도 그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고, 우연처럼 다가온 기회에 끌려 H는 결국 도박이라는 위험하고 매력적인 변화를 선택하게 된다. 그의 끝은 죽음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거 아닙니다. 웃고있는 거예요.
Pleasure 한번도 싸움에서 져 본적이 없는 남자 P. 퍼즐 조각처럼 미래의 잔상들이 눈에 보이는 그에게는 무서울 것이 없었지만 딱 그만큼의 무게로 무력했다. 다가오는 미래가 뭔지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 그걸 잊기 위해 P는 사채업자로 살며 쳇바퀴 같은 일상에 자신을 가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에 나타난 S라는 여자, 다른 이들과는 달리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서 P는 오히려 기쁨을 느낀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그 불확실성에 너무도 기뻐하던 이 남자. P의 끝도 죽음이었다.
주인공 S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Sorrow 젊고 예쁘고 노래하며 춤을 추던 S의 직업은 연예인. 모두에게 사랑받고 주목받는 것 같은 S의 삶은 사실 시작부터 슬픔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첫 날, 긴장하는 딸을 위해 빗 속에서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던 S의 아빠는 딸이 보는 앞에서 차에 치여 숨진다. 도박 빚을 감당못해 전전긍긍하던 S의 매니저는 결국 악랄한 사채업자에게 S의 소유권을 팔아넘기고 도망친다. 마침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이제 막 행복하려는 순간, 잠깐의 실수로 인해 그가 총에 맞아 죽게 되고- 병원 옥상에 올라가 그 난간에서 몸을 던졌던 S, 그러나 그녀의 끝은... 오히려 삶.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제 운명이자 삶이었어요' 그런 그녀가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Love 사랑이 삶이고 삶이 곧 사랑인 L, 친구와 결혼해 행복해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L의 일상이다. 평생을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The Air I breathe 행복-기쁨-슬픔-사랑의 네 귀틀로 잘 짜여진 영화, 내가 숨쉬는 공기 The Air I breathe.네 가지의 감정을 주제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네 명은 결국 묘하게 얽혀지게 된다. 사채업자와 증권사 직원, 외과의사와 연예인이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네 명. 두서없는 그네들의 이야기를 신나게 듣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아하,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거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서야 그 큰 그림이 보이면서 눈이 밝아진다. 그러니까 너랑 너랑 너랑 너랑 이렇게 묘하게, 사소하지만 의미있게 연결돼있었구나, 알고 보면 우리 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대에 존재하는 거구나 하고. 그제서야 조금 위로가 된다.
The Air We breathe 함께하는 공간에서 내가 숨쉬는 공기는 곧 당신이 숨쉬는 공기이기도 하다. 완벽하게만 보이는 엄친아와 엄친딸의 삶은,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로 밑바닥을 기고 있을지 모르는 일. 미친듯이 날뛰는 이 놈의 감정들이 사실은 내가 ‘살아있다’는 생생한 증거이기도 하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에 아름다운 게 바로 내일인거다. 그렇게 다들 살아가는 모양이다. 한 가지 단어로는 절대 규정될 수 없는 무엇, 불명확하고 무례하기까지한 감정들에 파묻혀서 다들 살아가나보다. 내가 내뱉은 공기를 당신이 들이마시면서, 호흡을 섞으며 그렇게 알게 모르게 얽혀서.
그리하여 삶은 결국 '살아지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과 어찌할 수 없다는 허무 속, 심지어 살아있다는 걸 까먹는 때에도 삶은 계속 진행되고야 만다. 그러니까 이건 어쩌면 희소식일지도. 그렇게 혼자 살아남은 여자에게도 나에게도.
덧2) 예전엔 아무 생각없이 봤는데 다시 보니 놀라웠다. 이 영화에 평점 후하게 줬던, 대학내일 문화팀의 높은 안목에 뜬금없는 감사를. 거기서 안 봤으면 이거 아예 몰랐을 수도 있겠다 싶거든.
덧3) ‘쿠마와 해롤드’에서 만났던 동양계 배우가 깜짝 출연했다. 다른 영화에도 요렇게 가끔씩 팝업!하고 튀어나와주면 좋겠다는. 아는 사람 만난거 같아 괜히 뿌듯했음 :)
어머니에게서 실마리를 얻은 영화의 키워드
한국에서 영화의 주인공이 될 4명의 캐릭터를 찾아낸 감독은 이 캐릭터들을 어떻게 하나로 연결시킬지 고민에 휩싸였다. 그 해답의 실마리를 던져준 사람은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희(喜)','노(怒)','애(哀)','락(樂)' 이라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감정에 대해 이야기 해주며 "모든 인간은 이 4가지 감정을 통해 서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얽혀 있다"고 설명해 준 것. 감독은 슬플 애(哀)를 사랑 애(愛)로 바꾸어 각 인물간의 연결고리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또한 여기에 유명한 동화인 '오즈의 마법사'의 4명의 주인공들이 정체성을 찾아 간다는 이야기를 반영했다. 네 명의 주인공들이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서로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처럼 4가지의 감정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하나의 결말로 이어진다는 것. 이렇게 동양의 정서와 헐리우드의 감성이 녹아 들어 지금의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내가 숨쉬는 공기>는 원래 한국 영화
애초에 <내가 숨쉬는 공기>는 한국에서 촬영하려 했던 작품. 캐릭터의 영감을 한국에서 찾아낸 만큼, 이지호 감독은 서울에서 촬영을 하고 한국 배우들을 캐스팅 할 것을 염두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하지만 초고를 본 매니저와 에이젼트는 시나리오에 매우 놀라워하며, 미국에서 제작을 권유한 것. 한국식 감성과 유머가 헐리우드에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던 이지호 감독의 염려와 달리 제작자 폴 쉬프는 시나리오에 크게 만족했고, 결국 헐리우드에서 제작되어 거꾸로 한국에서 개봉하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면 어떤 캐스팅과 어떤 영화로 탄생 되었을지 궁금증을 자극시킨다.
2년간의 캐스팅 작업, 앤디 가르시아까지 설득시키다
출연 배우마저 감탄한 캐스팅에는 자그마치 2년여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웠던 캐스팅은 다름 아닌 앤디 가르시아이다. <대부3><오션스>시리즈 등 헐리우드 대표 영화들에 출연해온 배우이자, 감독으로서도 그 파워를 자랑하는 앤디 가르시아는 신인 감독과는 절대 일하지 않는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던 것. 하지만 자신이 생각한 캐릭터에 앤디 가르시아 외에 적역이 없다고 생각한 이지호 감독은 영화의 모든 장면을 그린 스토리 보드와 사운드 트랙을 준비해 장장 4시간에 걸쳐 앤디 가르시아의 저택에서 미팅을 가졌다. 커다란 시가를 물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앤디 가르시아는 극 중 보스 못지 않은 위협으로 다가왔지만, 이지호 감독은 열정과 자신감으로 그를 결국 설득해 내는데 성공했다.
아내의 내조와 배우들의 도움으로 영화를 완성하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바로 촬영도중 감독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 될 뻔 한 것. 멕시코 시티 촬영 중 병에 걸린 이지호 감독은 온 얼굴을 덮은 물집과 종기로 후반 30%의 촬영 동안 거의 실명상태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촬영은 이틀간 중단 되었고, 셋째 날 아침 프로듀서들은 촬영이 하루 더 지연될 시 감독을 교체한다는 사실을 통보해 했다. 국내와 달리 까다로운 헐리우드 영화 제작법에 따라 더 이상 카메라를 잡을 수 없게 된 것. 몇 년 만에 눈물을 터트린 그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다름 아닌 배우자 김민과 출연진들이었다. 김민은 직접 휠체어를 주문해 매일 감독을 촬영장까지 데려갔고, 촬영 종료 후에는 쓰러진 그를 들것에 실어 데려왔다. 특히 가장 까다로웠던 앤디 가르시아 마저 "감독이 난관에 부딪혔으니 우리 모두 함께 하자"라며 감독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촬영과 연출을 도왔다고. 그야말로 피땀 어린 노력으로 이루어진 영화인 것이다.
<내가 숨쉬는 공기>에서 발견하는 한국
영화 속에서 관객들, 특히 한국 관객의 시선을 가장 사로 잡는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케빈 베이컨이 주인공을 맡은 '사랑'을 담은 스토리 중 어린 시절 장면이다. 극 중 케빈 베이컨이 첫 사랑과 키스 놀이를 할 때 종이로 만든 '동서남북' 놀이를 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는 것. 이는 종이를 접어서 횟수에 따라 뽑기를 할 수 있는 한국인이 즐겨 하던 유년 시절의 놀이이다. <내가 숨쉬는 공기>에서는 감독의 개인적 경험을 살려서 특별히 삽입된 것이다. 이 밖에도 '지영'이라는 한국 이름을 영화 속 캐릭터로 넣은 것 또한 이지호 감독의 뜻이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한국 감독이 할리우드에 진출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국 관객들 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이지호 감독, 극 중 카메오 출연 화제
배우 김민의 남편으로도 국내에 많이 알려진 이지호 감독의 친숙한 얼굴을 <내가 숨쉬는 공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가수 '트리스타'(사라 미셀 겔러 분)가 한 방송국과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프로그램의 FD로 깜짝 출연 한 것. 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끔한 그의 모습은 언뜻 놓치면 평범한 동양 배우로 오해 받을 수 있을 정도이다.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해온 영화이자, 자신의 첫 장편 영화인만큼 특별히 카메오 출연을 한 이지호 감독. 각본에서부터 연출, 그리고 출연까지 그야말로 1인 3역을 해낸 이지호 감독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