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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함께/취한 글들의 시간

사람을 믿지 않으면 세상은 끝이다, 이병률



습관처럼 다닌다. 습관처럼 여행을 다니려고 한다. 여행을 다니는 습관만큼 내가 사람을 믿는 건 사람에게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으로부터 받을 게 있다는 확신에 기대는 바람에 나는 자주 사람에 의해 당하고 패한다.

어제 쿠스코 광장에서 만난 소년도 그렇다. 나를 묘지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매주 일요일이면 네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와서 엽서 파는 일을 한다는 소년은 자신의 학비벌이와 아픈 어머니를 위해 여행자들에게 도움 주는 일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서너 시간 나에게 도움을 주고서 그가 원한 노동의 대가는 터무니없는 규모의 가전제품이었다. 그래도 그가 원하는 규모의 절반 크기 되는 가전제품을 들려 보내면서 괜스레 부족하고 모자란 기분이 들어 영어사전까지 사 들려 보냈지만 그와 악수를 하고 헤어지는 순간, 그때서야 당했다는 기분을 어쩌지 못했다. 그 아이가 나에게 했던 말들 모두가 거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항상 당하는 쪽인 나 같은 이에게 쓸쓸함만 남는 건 아니다. 고맙게도 쓸쓸하면 할수록 다시 사람을 더올리며 사람의 풍경 안으로 걸어갈 힘이 생긴다.

열흘 전 볼리비아 소금사막을 가는 버스 안에서 만난 미국인도 그랬다. 그는 정부 관료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내가 잠깐 배낭을 맡기고 세수를 하러 간 사이 그는 나의 배낭을 열어 선글라스를 가져갔다.

하노이에서 호수를 산책하던 중에 만나 얘기를 나누던 대학생도 바닥에 내려놓은 배낭을 열었고, 언젠가 암스테르담에서는 영화관 옆자리에 놓아둔 가방도 그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에 의해 잃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상황이든 설마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한번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여행은 끝이다. 그만큼 자유롭지도 못할분더러 기회도 적기 마련.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생각한 친구를 믿은 적 있으나 그는 나를 믿어주지 않았고 한 사람을 믿은 적 있으나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닌 듯하였다. 그 울림은 더 장황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옮겨가면 그뿐이었다. 내가 사람에게 함부로 대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기에 당함으로써 배우는 것이라 자위하면 되는 것.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중국의 왕희지가 서예를 연마하기 위해 연못물이 까매지도록 먹을 갈았는데 이를 두고 묵지(墨地)라 했다는 일화처럼
나는 사람을 믿기 위해 끊임없이 다닐 것이고 그렇게 다님으로써 사람의 큰 숲에 당도하기를 희망한다.

역사가 길지 않은 믿음은 가볍다. 그 관계엔 부딪침만 있고 따분함만 있을 것이며 혼자인 채로 열등할 뿐이며 가벼울뿐더러 균형마저 잃는다. 심연은 깊은 못이나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그 한가운데 존재한다.

사람을 믿지 않으면 끝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끝이고 더 이상 아름다워질 것도 이 땅 위에는 없다.

                                                                                           - 이병률, '끌림', 페루에서 쓰는 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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