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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함께/취한 글들의 시간

"내 삶은 죽음이 연장해 주고 있다."


죽음의 예술가



<뉴욕타임스> 사회부에서, 죽은 사람에 대한 사망 기사만 맡아 쓰는 사람이 있다. 알덴 휘트먼 기자이다. 유명 인사가 세상을 뜨면 그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기사로 쓰는 일. 그래서 '추모사 전문'이라는 별명이 늘 붙어 다니는 알덴 휘트먼은, 나름대로 그 일에 대한 정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충성심이다.


이제 예순이 되어가는 나이의 그는 평생 아내 조안에게 큰소리 한 번 안 쳤을 만큼 조용조용한 성격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치열하다. 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사이, 그의 머릿속은 벌써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타임스 스퀘어의 사무실에 들어선 그는 먼저 아침 신문들을 뒤적여 누가 입원을 했다거나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기사들을 추려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 뒤 곧장 조사부로 올라가서, '오늘내일하는' 유명 인사들의 '상태'를 검토해야 한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메이요 병원에 들렀다는데 혹시 어디 아픈 게 아닐까?'


이런 식으로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세상의 누가 갑자기 죽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가능성이 높은 유명인을 중심으로' 기사를 검토하고, 그가 사망하면 당장 신문에 기사를 실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해 놓은 추모 기사도 없는데 교황이나 대통령이 죽는 것처럼 난처한 일은 없었는 것이다.


휘트만에게 사망 기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예술 작품이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죽었을 때, 그는 말할 수 없는 좌절감을 느꼈었다. 사실 휘트먼은 알아주는 잡학가였다. 이를테면 역대 교황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고 제정로마 황제들의 통치 기간과 가족사, 나이애가라 폭포의 높이, 뱀은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다는 것, 고양이느 장소에 애착을 느끼고 개는 사람에게 애착을 느낀다는 따위는 줄줄꿰는 등 별별 잡다한 지식이 풍부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인데, 안타깝게도 부버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사망 기사를 막 내보내야 할 판국에 와서 새삼스레 그의 저서들을 읽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다행히도 부버의 사상에 통달한 친구의 도움을 얻어서 겨우 기사를 쓰게 되었다. 무사히 상황을 넘긴 그 날 밤. 휘트먼은 2층 그의 서재에서 서성대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엉터리 같으니. 다 가짜야. 피상적인 것뿐이었다고."


그렇게 투덜거렸다고 한다. 그만큼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이 가득한 그였다. 공교롭게도 이튿날 마르틴 부버에 대한 기사가 좋았다는 격려 전화가 여러 통 걸려 왔다. 그래서 휘트먼은 더욱 환멸을 느꼈다는 것이다.


휘트먼의 사망 기사들 가운데 스스로 잘 썼다고 꼽는 것은 앨버트 슈바이처, 윈스턴 처칠, T.S.엘리엇에 관한 글이었다. 특히 엘리엇에 대한 기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걸작이었다. 거기에는 간단한 이유가 있다. 휘트먼은 과거에 하버드대학에서 엘리엇의 강의를 들어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에 대한 추모 기사를 멋지게 쓰려면 우선 그 인물에 관해서 아는 것이 많아야 함은 물론이었다.


요컨대 루빈스타인의 연주를 들으면, 휘트먼은 그 연주 자체보다도 다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루빈스타인의 키가 어느 정도이고 연주할 때의 어떤 버릇이 있으며 좋아하는 차가 무엇이었는지 등, 그가 죽은 다음에 생생한 묘사를 할 수 있는 자료에 더 큰 흥미를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정보들이 모이면, 휘트먼은 다음 날 회사 조사부로 가서 미리 만들어 둔 사망 기사를 찾아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곤 했다.


휘트먼에게 세상 모든 사람은 그가 만드는 '작품'의 소재이다. 그리고 그 소재는 주인공이 죽어야만 가치를 지니게 된다.


사람만 보면 죽음을 생각하고 미리 사망 기사를 써놓다 보니, 어떤 때엔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는 일도 많았다. 과연 휘트먼으로서는,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더라도 죽어야 실감이 나지 살아 있으면 별로 쓸모가 없는 모양이다.


어쩌다가 어느 유명 인사의 사망 기사를 미리 써 놓고 보면,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로 잘 써진 것 같은 글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면 그 글이 어서 빛을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던 때도 간혹 있다고 한다.



그가 미리 사망 기사를 써두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나이가 많거나 병을 앓고 있어 곧 죽을 사람들과, 한때 유명인이었지만 이제는 활동이 별로 없어서 '살아 있어 봤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인물들'이 그들이다.


그가 일하는 편집국은 축구장만큼이나 넓다. 그 안에서 온 세상의 움직임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그 안에 전 세계의 모든 유명인이 고스란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편집국의 생명은 긴박함과 생동성이다. 세상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언제 어디서 누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휘트먼은 생전의 마오쩌둥, 트루먼, 피카소, 그레타 가르보, 마르네 디트리히 같은 이들의 사망 기사를 미리 써놓았었다. 그리고는 그들이 죽는 날까지 틈틈이 한 구절, 한 단어씩 고치고 다듬어서 걸작을 만들어 놓았다.


자신의 사망 기사를 읽는다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터이다. 언젠가 <뉴욕타임스> 편집국장이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때이다. 어느 기자가 서둘러 그에 대한 사망 기사를 만들었는데, 다행히 응급 소생술로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기자가 이거 한 번 봐 보시라며 그 기사를 국장에게 건네었다고 한다. 혹시 틀린 곳이 있으면 수정을 하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자 국장은 또다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밍웨이 같은 사람은 그 반대의 경우이다. 그는 자기가 아프리카에서 사망했다는 기사들을 모두 오려 두툼하게 스크랩을 해 놓고 좋아했다고 한다. 로웰 림푸스라는 기자는 '자기에 대해서는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다'면서 본인의 사망 기사를 스스로 써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죽음은 누구나 꺼리는 무엇이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을 꺼린다. 그러나 알덴 휘트먼에게는 죽음처럼 고마운 것이 또 없다. 그는 죽음의 예술가이니까 말이다. 만일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사람의 보람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역설적으로 말한다.


"내 삶은 죽음이 연장해 주고 있다."


그렇듯 죽음과 가까이 지내는 알덴 휘트먼이지만, 그는 쉽게 상상하듯 그렇듯 음산하고 괴이한 사람이 아니다.

미남은 아니지만 부드러운 인상, 매사에 진지하고 심각한 그는 아침 식사를 늘 스스로 만들 정도로 가정적이다. 거의 온종일 파이를 물고 있으며, 테가 두툼한 안경을 끼고 조용히 책상에 앉아 일하는 편이다. 그러나 어느 정치가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거나 병원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장에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이다.


그는 1936년 이후로 항상 틀니를 끼고 다녔다. 그가 쓴 기사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로부터 얻어맞아 치아 서른두 개가 몽땅 부러졌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대부분 충치라서 별로 아까울 것이 없다. 나를 때린 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 소신이 있어서 그랬을 테니 탓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손에 닿는 신문은 물론 하루에 두 권씩 책을 읽을 만큼 그의 독서량은 상당하다. 또한, 험프리 보가트의 <카사블랑카>를 서른 번도 더 보았을 정도로 광팬이다. 그의 두 번째 아내 조안은 목사의 딸이지만 그는 무신론자이다.


뉴욕 니커바커 병원에 휘트먼이 입원했을 때, 사회부의 어느 기자가 그 대신 사망 기사를 준비하는 일을 맡았다. 휘트먼이 퇴원해서 기사를 썼다면,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을 것이다.


'세계의 저명인사들에 대한 사망 기사를 쓰던 알덴 휘트먼은 어젯밤 갑자기 심장마비로 뉴욕 116번가 서구 600번지 자택에서 사망했는데……. 그는 1913년 10월 27일 노바스코샤에서 출생했고, 두 번 결혼했으며, 첫 아내에게서 두 아이를 두었다. 뉴욕 신문협회에서 주로 활동한 그는 1935년에 폭행을 당해 치아가 몽땅 부러졌으며, 1937년에는 수영을 하다가 익사할 뻔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록해야 할 사항이 있다. 적어도 그는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누구 못지않게 열심이었다는 사실이다.


-<노란손수건>p182, 2010년, 샘터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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