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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함께/'인간적'인 만남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 유나 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 쏟아져 내린 장맛비처럼, 수 초 사이 불어나 목까지 차올라버린 빗물처럼, 그렇게 삽시간에 모든 일은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모든 것을 잃고 혈혈단신, 적의로 가득 차있는 북한 땅에 홀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 [북한억류 142일간의 기록- 저널리스트 유나 리] 편

백지연과 인터뷰 중인 한국계 저널리스트 유나 리(Euna Lee)

처음에 이 방영분을 유심히 본 것은 단순한 흥미에서였다. ‘한국계 여기자’가 ‘북한’에 억류됐었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 그것만으로도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론에 노출되길 꺼려했던 그녀(유나 리)가, 2년 간의 긴 침묵을 깨고 세계 최초로 ‘피플 인사이드’의 인터뷰에 응했다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서 있어야 했던 시간. 그 142일 동안 유나 리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붙잡고 버텼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솔직한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2009년 3월, 두만강 일대에서 중국계 기자 로라 링과 함께 탈북자 문제에 대해 취재하던 유나 리. 북한 쪽에서의 촬영을 순조롭게 마치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돌아오려던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북한군들에게 포위된 유나 리와 로라 링은 순식간에 그들에게 휩싸여 붙잡히고 만다. 그리고 이어진 북한 땅에서의 피 말리는 시간들. 북한의 고위 간부들은 중국계인 다른 여기자보다도 한국계인 유나 리에게 더욱 가혹하게 굴었다. 제대로 잘 수도, 먹을 수도, 깨어 있을 수도 없는 하루하루와 더불어 거듭된 취조와 재판 끝에 내려진 것은 무려 ‘12년’ 이란 어마어마한 기간의 노동교화형 선고였다.

“너는 민족의 반역자다, 어떻게 같은 민족으로서 반역을 저지를 수 있느냐!”

이 모든 것을 실제로 경험한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는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만약 내가 기자였고 저 상황에 있었다면, 나는 그녀처럼 내 목숨보다도 취재원 보호를 위해 먼저 휴대폰과 녹화 테이프를 몰래 버릴 수 있었을까. 아는 사람이 말 그대로 ‘단 한명도’ 없는 북한 땅에서, 죽음이 추상이 아닌 실체로 다가와 나를 코앞에서 위협하는 그 무서운 상황에서, 나는 그녀처럼 남편과 딸에게 편지를 쓰며 매일 ‘살아야한다’고 다짐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자신이 없다. 그녀가 가진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삶에 대한 의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유나 리의 경우는  특별한 케이스이지만, 사실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순간에 처하는 것 같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모르겠는 상황 말이다. ‘사면초가’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는, 앞뒤는 물론이거니와 양 옆 조차 보이지 않는 막막하고 캄캄한 순간. 그건 취업전선에서 늘 실패만을 경험하고 있는 20대일수도, 안정된 직장을 정리해고로 하루 아침에 잃은 30대일수도 있다. 아니면 나처럼, 예고 없이 찾아온 큰 사고로 인해 계획했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사람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에게 유나 리는 인터뷰를 통해 내내 말하고 있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지금은 비록 상황이 나쁘더라도 언젠가는 이것이 변해 모든 게 좋아질 거라고. 그러니 그 순간이 오기 전엔 쉽게 포기하지 마시라고.

'갓 블레스 유(God bless you), 유나 리’

결말이 미리 정해져있던 3번의 재판 후. 12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깊은 절망에 빠져있던 유나 리는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그 마지막 순간에서 다시금 희망을 만나게 된다. 바로 빌 글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이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문으로 인해 상황은 급변했고, 결국 두 여기자는 기적처럼 ‘특별사면’을 받아 142일의 죽음과도 같았던 시간을 마치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공포와 절망에 목 졸렸던 그녀들을 안아준 클린턴 대통령의 첫 마디는 '갓 블레스 유(God bless you). 정말이지 은혜와도 같은 극적인 사면 앞에 유나 리는 눈물 흘릴 수 밖에 없었고, 눈 앞에서 바로 죽음을 비껴간 그녀의 흐느낌과 무너짐은 그대로 방송을 타고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게 해준, 딸 '하나'와 남편과의 상봉 
“다시 한번 선택의 순간이 와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부디 내 이야기가 그들을 기억하는 계기가 되어 절망의 끝에 있는 탈북자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길 바란다.”


2회를 걸쳐 진행된 길고 긴 인터뷰 끝에 그녀가 고백한 말이다. 다시 또 그 순간에 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니. 강제로 억류되었던 북한에서의 기억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말한다. 자신이 가서 보니 어렸을 적 맡아본 할머니 집의 풀냄새가 그 땅에서도 났었다고. 북한의 권력과 북한의 주민은 다르니, 북한을 정치적으로만 대하지 말고 ‘인간적으로’ 대해야 함을 알았다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었던 시간을 온몸으로 겪어내고도 그녀는 오히려 자신을 탄압했던 ‘북한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것, 어쩌면 이게 그녀가 142일간의 그 고통스러운 날들을 견디게 해준 정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먼저 상황을 바라보는 눈을 변화시키세요’

백지연 씨와 유나 리 씨의 팽팽하고도 긴장된 인터뷰, 쉽지 않음을 알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질문들과 그에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풀어내는 답변들. 보물과도 같은 이 2회의 인터뷰를 나는 특히, 지금의 나를 포함해 현재 인생의 어두운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언제나 좋거나 언제나 나쁠 수 있다. 하지만 유나 리의 말처럼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느냐고 묻는 것은 우리를 절망으로 내몰 뿐. 그보다는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이 아픈 경험을 거름 삼아 자신이 정말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걸 버려도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는, 바로 그 가치를 우선순위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돌아봄은 물론, '유나 리'라는 좋은 롤모델을 소개해준 피플인사이드 제작진에게 감사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