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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2021)/2021 쪽글 모음

기본값

"정말 이렇게 하실 거예요? 여기 이렇게 체크한 거 맞으시죠?"

 

심드렁한 표정이었던 공무원이 두어번 물었던 것 같다. 지난 주 혼인신고를 하러 마포구청에 갔을 때의 일이다. 혼인신고서 중 '자녀의 성과 본을 모의 성과 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란에 '네'라고 체크한 것 때문이었다.

 

나와 남편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다시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니 그는 이번엔 서약서를 내밀었다. 공무원이 다시 별도로 출력해 내민 '협의서'란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협의서>

 

부의 성명

등록기준지

주소

 

모의 성명

등록기준지

주소

 

위의 부와 모 사이에서 태어날 모든 자녀의 성과 본을 모의 성과 본으로 정하기로 협의합니다.

 

부의 서명

모의 서명

덧. 제출인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주민등록증

 

말하자면, 부의 성을 따르는 게 '기본값'이었던 셈이다. 모의 성을 따르겠다고 하니 번거로운 절차들이 딸려왔다. 공무원의 재확인, 별도의 협의서, 신분확인 등. 공무원은 한마디 덧붙였다.

 

'나중에 바꾸려면 소송이 필요해요. 확실한 거 맞으시죠?'.

 

남자친구는 사실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는다(나는 고민 중이다). 그랬기에 내가 얘기를 꺼냈을 때 조금은 더 편하게 오케이를 했는지도 모른다. 양가 부모의 허락도 구하지 않았다. 불필요하다고 판단해서인데, 만약 얘기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진 모르겠다.

 

만약 우리가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고, 그 아이가 내 성을 따른다고 해도 내 성은 내 아버지의 성일 뿐인데. 바위만큼이나 단단한 가부장제 앞에서 모래가루 한 줌 흩뿌리는 것이나 다름없을텐데. 그런데도 왜 이리 번거로운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고민하던 중 발견한 기사.

 

혼인신고서 작성하다 깜짝.. 우리 부부가 '비정상'인가요? | 다음뉴스 https://news.v.daum.net/v/20210127100300622

 

 

지금의 이 결정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모르겠다. 깊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다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굳이 정할 거라면 성과 이름을 결정할 권리도 아이에게 줘야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내가 정하지 않은 내 이름으로 평생을 살고 살아야 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 정도 결정권은 줄 수 있지 않을까.

 

휴대폰 본인인증을 하다보면 늘 성별을 체크하는 란을 만난다. 거기서 기본값은 거의 대부분 남성이었다. 주민등록 뒷자리가 2로 시작하는 것의 의미도 사회생활을 해보면서야 깊게 깨달았다.

 

나포함 내 옆주변 여성들이 성희롱성 발언을 듣고 겪고, 누가봐도 여자인 이름이 드러날 때마다 그런 메일과 쪽지와 댓글에 시달리고, 임신한 여자선배가 남성 결정권자에 의해 강제로 부서가 바뀌는 걸 보면서 깨달았다. 아 이 사회의 기본값은 남자였구나. 기본값 1이 남자라 나는 언제고 2등국민 취급 당하겠구나.

 

이준x 하태x같은 안티페미 정치인들은 이런걸 알면서도 모른체한다. 남녀성별 대결을 심화시키고, 그 혐오와 차별의 에너지를 동력 삼아 자신들 지지율따위나 올리려한다(그들이 하수인 이유다).

 

기본값이 남성인 한국.

 

평온했던 몇주 간 잠시 잊고 있었던, 그러나 그 자명한 진리를 혼인신고를 하다 만나게 될 줄은 예상 못했다. 혼인신고를 마치고 집으로 오던 그 저녁 길 붉은 노을이 왜인지 더 씁쓸했다.

 

 

(2021.01.29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