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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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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의 부고 순정 비가 오고 마르는 동안 내 마음에 살이 붙다 마른 등뼈에 살이 붙다 잊어도 살 수 있을까 싶은 조밀한 그 자리에 꿈처럼 살이 붙다 풍경을 벗기면 벗길수록 죄가 솟구치는 자리에 뭔지 모를 것이 끊어져 자리라고 할 수 없는 자리에 그 짐승 같은 시간들을 밀지 못해서 잡지 못해서 살이 붙어 흉이 많다 - 이병률, '순정' 전문,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꿈을 꾸었다. 한 때는 그렇게 상처였던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지나 어느새 추억으로 곱게 아름답게 미화되고 만다. 그깟 인연 스쳐가면 그만이라고, 잠시나마 사람 사이 연을 쉽게 생각했던 어리고 어리석은 그 무렵 나의 탓이다. 관통하는 모든 인연(因緣)이 흉이든 훈장이든 뭔가를 '남기고야' 만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이것으로 앞으로 다가오..
사람을 믿지 않으면 세상은 끝이다, 이병률 습관처럼 다닌다. 습관처럼 여행을 다니려고 한다. 여행을 다니는 습관만큼 내가 사람을 믿는 건 사람에게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으로부터 받을 게 있다는 확신에 기대는 바람에 나는 자주 사람에 의해 당하고 패한다. 어제 쿠스코 광장에서 만난 소년도 그렇다. 나를 묘지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매주 일요일이면 네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와서 엽서 파는 일을 한다는 소년은 자신의 학비벌이와 아픈 어머니를 위해 여행자들에게 도움 주는 일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서너 시간 나에게 도움을 주고서 그가 원한 노동의 대가는 터무니없는 규모의 가전제품이었다. 그래도 그가 원하는 규모의 절반 크기 되는 가전제품을 들려 보내면서 괜스레 부족하고 모자란 기분이 들어 영어사전까지 사 들려 보냈지만 그와 악..
당신이라는 제국, 이병률 당신이라는 제국 - '바람의 사생활' , 이병률 이 계절 몇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
견인, 이병률 견인 이병률 올 수 없다 한다 태백산맥 고갯길, 눈발이 거칠어 도저히 불가능 하다는 답신만 되돌아온다 분분한 어둠속, 저리도 눈은 내리고 차는 마비돼 꼼짝도 않는데 재차 견인해줄 수 없다 한다 산 것들을 모조리 끌어다 죽일 것처럼 쏟아붓는 눈과 눈발보다 더 무섭게 내려앉는 저 불길한 예감들을 끌어다 덮으며 당신도 두려운 건 아닌지 옆얼굴 바라볼 수 없다 눈보라를 헤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만항재에 도착한 늙수그레한 견인차 기사 안 그래도 이 자리가 아닌가 싶었다고 한다 기억으로는 삼십년 전 바로 이 자리, 이 고개에 큰길 내면서 수북한 눈더미를 허물어보니 차 안에 남자 여자 끌어안고 죽어 있었다 한다 세상 맨 마지막 고갯길, 폭설처럼 먹먹하던 사랑도 견인되었을 것이다 진종일 잦은 기침을 하던 옆자리의 당신 ..